복원현장·동헌 옛터 답사로 조선의 역사 한 자락 숨결 느껴

경주읍성 답사 모습
올해 조선 오백년 경주역사의 상징인 경주읍성의 일부가 복원됨에 따라, 경주문화원(원장 김윤근)이 관광안내를 맡아 지난 9월부터 현지답사가 실시하고 있다.

답사는 경주문화원에 비치된 ‘경주읍성모형’앞에서 전문해설사의 읍성개요 설명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옛 경주박물관 정원을 돌아보며 600년 된 은행나무, 300년이 넘은 산수유와 1926년 스웨덴 왕세자(구스타프 6세)가 서봉총 금관을 발굴하고, 이곳을 방문해 기념식수로 심은 전나무 등에 대한 이야기도 들려준다. 또한 뜰에 있는 에밀레종의 옛 종각이며, 구 경주박물관 전시실이었던 온고각(溫古閣 )과 금관고(金冠庫·금제류 유물전시실) 건물에 관한 비사(秘史)도 흥미롭다.

특히 1921년, 최초로 신라 금관을 발굴하고, 경주에 안전하게 보관할 건물이 없다는 이유로 경성(京城)으로 보내라는 조선 총독부에 맞서, 경주시민들이 당시 돈 1만1천 원의 거금을 모아 현대식 전시관(금관고)을 이곳에 짓고, 보란 듯이 금관을 보관했다는 일화도 들려준다. 그런데 그 역사적인 건물은 없어지고 집터만 남아 쉼터로 이용되고 있다.

조선시대 경주부 동헌의 옛터를 거쳐, 100여m 떨어진 곳에 ‘동경관(東京·경주의 옛 이름) 객관)이 있다. 조선시대 중앙 관리들이 출장 와서 유숙하던 객사인데, 경주부윤 주관 하에 매월 두 번, 임금에 대한 망궐례를 행하던 곳이기도 하다. 당초 건물은 세 채가 연결된 45칸의 큰 건물이었으나 지금은 팔작기와 지붕으로 된 큰 집 한 채만 경주경찰서 건너편에 남아있다.

동경관에서 가까운 동쪽성벽코너에, ‘경주읍성(慶州邑城)’이란 한자로 쓴, 색 바랜 비석이 서 있다. 읍성은 고려 현종 3년(1012년)에 축성돼 임진왜란 때 대부분 소실됐고, 그 후 일제강점기에도 현대도시 발전명분으로 헐리면서 낡은 동쪽성벽 90여m 만이 남아있다. 지금 이곳은 복원 공사 작업이 한창이다. 읍성 4대문중 동쪽문(향일문)을 새로 짓고, 동쪽성벽축성과 3개의 치성 건립이 거의 마무리 단계에 있다. 읍성 복원사업은 2030년까지 북문(홍진문)과 북쪽성벽을 쌓으며 계속될 것이라고 한다.

경주읍성 복원 현장
왕경사업 본부 건물 옆에 집경전 자리가 있다. ‘집경전 구기’ 비석이 있던 전각도 소실돼 그 비석만이 하마비(下馬碑)와 함께 구 경주여중 교정에 남아있다. 비석의 글씨 ‘集慶殿 舊基’는 ‘집경전 옛터’를 알리는 정조 임금의 친필이라고 전한다.

집경전에서 골목길을 따라 북·서쪽으로 한참 가면 우방 ‘명사마을’ 아파트 단지의 작은 녹지 쉼터에 ‘경주읍성 감옥터’라고 쓴 안내판이 있다. 조선시대 경주부 감옥이 있던 곳이다. 1997년 국립 경주문화재연구소가 구 문화중·고교 자리인 이 일대를 발굴 조사한 결과, 원형 담장에 동·서편에 마주선 두 채의 감옥건물이 있었고, 그 주변에는 해자(垓字)가 자리하고 있었다고 한다.

경주 동경관

마지막 코스인 구 서경사(西慶寺 )건물은 1932년경 지어진 일본 특유의 높이 솟은 불교사찰이다. 포교활동을 위해 일본 건축자재로 지은 정면 3칸, 측면 5칸의 목조건물인데, 2009년 주변을 정비하여 공원화했다.

경주 중심지역에 있는 이 읍성은 옛 경주부의 정치행정중심지로서 경주역사·문화의 산실이자 많은 문화유산의 보고이다. 경주가 신라유적에 이어 조선 역사 관광지로도 기대를 모으고 있다.

한편 오는 18일에 읍성투어가 있으며, 신청은 경주문화원홈페이지(www.gjuce.or.kr) 또는 전화(054-743-7182)로 하면된다. 참가비는 무료.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