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고구려의 위세 맞서 대당외교 박차

진덕여왕 5년 창건된 불영사

어질고 슬기로웠던 선덕여왕이 승하하고 사촌동생인 제28대 진덕여왕이 즉위하였다. 진덕여왕은 신라의 마지막 성골(聖骨)이었으며 이름은 승만(勝曼)이다. 승만은 불교식 이름인데, 석가모니 당시 인도 사위국(舍衛國)의 공주로서 총명하고 자비심이 깊어 승만부인경의 주인공이 된 여인이다. 진덕여왕은 선덕여왕 시대의 비담의 난을 진압한 김유신과 김춘추에 의하여 옹립되었다. 여왕은 더욱 조여드는 백제의 공격과 고구려의 위세에서 벗어나고자 대당외교에 박차를 가하였으니, 친히 태평가를 짓고 비단을 짜서 그 가사를 수놓아 당나라 고종에게 바쳤다. 이것이 유명한 대당태평송으로서 명문장이다.대개 이때는 김유신의 동생인 김흠순을 석방하여 달라고 청할 때의 일이다.

태평가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대당(大唐)이 왕업(王業)을 여니 높디높은 황제의 길 융창하도다. 창과 갑옷을 그치니 위엄이 정해졌고 문을 닦으니 백왕(百王)과 이었네. 하늘을 거느리니 비 내림을 높였고 만물을 다스리니 아름다움을 머금었도다. 깊이 어짐은 해와 달 같고 운수를 휘두름은 우당(虞唐)을 지나네...(중략) 산악이 재보(宰輔) 대신을 내리니 황제는 충량(忠良)한 이에게 일을 맡기도다. 오제삼황이 한 덕이 되니 우리 당나라 황실이 밝게 빛나리(大唐開洪業 巍巍皇猷昌 止戈戎威定 修文契百王 統天崇雨施 理物體含章 深仁諧日月 撫運邁虞唐 ... 維嶽降輔宰 維帝任忠良 五三成一德 昭我唐家皇).

태평가는 명문장이다. 상대를 칭송하면서 고금의 역사적 사실과 고문에 의거하면서도 운율에 맞추어 아름답고 중후한 문장으로 표현했다. 理物,雨施,含章,統天 등이 모두 주역의 글이다. 주역 중천건괘 단사에, “크도다! 건원이여, 만물이 여기에서 비롯하나니 이에 하늘을 거느리도다(大哉 乾元 萬物資始 乃統天)”란 글이 있는 것이다. 덩시 이미 신라에 유교경전과 작문에 밝은 학자가 있었음을 입증하고 있다.

이 시대에 알천공, 임종공, 술종공, 호림공, 염장공, 유신공이 있었는데 이들은 남산 우지암에 모여 나라의 일을 의논하였다. 이 때 큰 호랑이(大虎) 한 마리가 좌중에 뛰어드니 여러 공들이 놀라 일어섰는데 알천공만은 조금도 움직이지를 않고 태연히 담소를 하면서 호랑이의 꼬리를 붙잡아 땅에 매쳐 죽였다. 알천공의 완력이 이처럼 세어서 수석(首席)에 앉았으나 모두 유신공의 위엄에 복종하였다.

신라에는 네 곳의 신령한 땅이 있어 나라의 큰일을 의논할 때에는 대신들이 여기에 모여서 의논을 하면 일이 반드시 이루어졌다. 이 신령스러운 땅의 첫째는 동쪽의 청송산, 둘째는 남쪽의 오지산, 셋째는 서쪽의 피천, 넷째는 북쪽의 금강산이다. 진덕여왕 때 비로소 설날 아침의 조례를 행하였고, 또한 시랑(侍?) 이라는 칭호도 처음 사용하였다.

신라의 관제는 여러 차례에 걸쳐 분화발전하였는데, 진덕여왕은 진흥왕이 만든 품주를 집사부로 개칭하여 행정집행의 중심권력을 장악하게 하였다. 집사부의 장은 중시(中侍)로서, 일종의 재상이다. 이는 회의식 정책결정이 점차 재상제도로 변화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중국식 의관(衣冠)과 연호(年號), 책력을 사용하였다. 책력은 정삭(定朔)이라 하여 큰 달과 작은 달을 계산하여 윤달을 넣고 시일(時日)을 정하는 일상생활의 중요한 기준인데, 도량형(度量衡)과 함께 주로 천자국이 행하는 문물제도에 속한다. 우지암회의의 수석인 각간 알천공은 집사부의 장이 되기도 하였는데, 선덕여왕 시기에 여근곡에 습격한 백제군을 물리친 분이다. 그리고 술종공의 아들이 향가에 나오는 죽지랑이고 무림공의 아들이 유명한 자장율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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