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향·바다내음에 취해 힐링···과거 시간의 흔적을 더듬다

수평선을 뚫고 올라오는 해
어제는 익숙한 공간에서 벗어나 낯선 곳에서 하룻밤 묵었다. 동해의 밤과 낮 얼굴을 모두 보고 싶어서다. 동트기 전에 눈이 떠졌다. 커튼을 걷고 베란다로 나갔다. 푸른 바다가 장엄하게 펼쳐져 있다. 너였구나, 밤새 귓속을 간지럽히며 찰그랑거린 게. 담요를 어깨에 두르고 일출을 기다렸다. 해맞이 공원에서 맞이한 새벽, 묘한 설렘. 수평선을 뚫고 올라오는 붉은 빛, 바다가 깨어난다.

해맞이공원 돌비석에서 내려다본 바다는 넉넉하고 깊다. 바람, 갈매기, 파도, 자동차 경적과 사람들 말소리가 살아있음을, 절대음감을 지닌 것에 대한 감사함으로 다가온다. 이곳에서 해파랑길 21코스 도보 여행은 시작된다. 이 길은 블루로드 ‘푸른 대게 길’ B 코스로 해안선 따라 축산항까지 이어진다. 그동안 경주에서 해안 따라 쭉 걸어오면서 멋지다, 아름답다. 비경이다. 장관이다 등, 어지간한 감탄사와 수식어는 얼추 다 뱉어낸 것 같다.
블루로드 다리
바다를 내려다 보고 선 돌비석
몇 개의 단어나 문장으로 자연의 경이로움을 표현하는 것에 한계를 느낀다. 무한한 절경 앞에 서면 그냥 무념무상, 숨이 멎는 기분이다. 해맞이공원에서 대탄해수욕장 가는 길 역시 그러하다. 호젓한 외길이 끝없이 이어진다. 기암괴석과 바다, 하늘과 길만 보인다. 길의 끄트머리에 서면 하늘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 착각마저 든다. 바윗길 끝나는 지점에 흙길과 솔숲이 이어진다. 이곳은 북쪽에는 청룡이 남쪽에는 백호가 있는 형상이다. 거기에다 뒤쪽의 높은 산에서 뻗어 나온 기가 해안 바위로 흐르고 있어 강하고 좋은 기(氣)가 모여 있다. 일명 기 받기 좋은 장소다. 나그네를 위해 벤치까지 준비되어 있으니 잠시 가던 길 멈추고 명상이라도 하고 가면 어떨까.
기암괴석과 나무 난간 길
동물형상을 한 기암괴석
맑은 기로 충전되어서일까. 발걸음이 한결 가볍다. 바다에 아랫도리를 담그고 앉은 괴석이 보인다. 동물형상을 하고 있는데 사람이 서 있는 위치에 따라 그 모습이 달리 보여 이리저리 뜯어가며 감상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대탄리와 오보리 가는 길에서 만난 수많은 기암괴석, 혹시 이것과 지명이 관련이 있을까 싶어 자료를 찾아보았지만 특별한 연관성은 없었다. 대탄은 동해 바닷가 큰 여울 옆이라 해서 해여울, 해월로 불렸고 16세기경에 정영용(鄭英用)이 마을을 개척하였다는 정도의 정보만 찾을 수 있었다.

새천년기념 마을 숲이 트레이드마크인 오보리는 마을 입구에 있는 바위가 까마귀(烏)의 머리를 닮았다 해서 “올치미”라고 불렀다. 이 말이 전해 내려오면서 오보(烏保)로 바뀌었다고 한다. 부드러운 곡선의 오보해수욕장은 모래가 부드럽고 입자가 고우며 조용하고 평화롭다.

곧이어 만난 노물리는 지명이 특히 정겹다. 노물리라, 발음하면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이곳 역시 자세한 유래는 알 수 없다. 단 「노물(老勿)」이 늙지 말라는 뜻이니 장수(長壽의 의미를 담고 있지 않을까. 물(勿)자는 고구려 계통의 언어로 4∼5세기 경 고구려가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영덕 지명을 야시홀이라 지었는데 그때 함께 지어진 이름으로 추측하고 있다.

따스한 볕이 마을 지붕에 소복하게 내려앉아 있고 동네 앞 가로등에는 갈매기 한 마리가 올라앉아 마치 수호신처럼 동네를 굽어보고 있다. 어항에 오종종히 내려앉아 고깃배를 기다리며 수다 떠는 갈매기를 프레임 속으로 불러들인다. 자연산 돌미역이나 미역귀, 오징어가 필요하면 직접 판매하는 집이 있으니 사도 괜찮을 것 같다. 넉넉한 마음도 덤으로 얻을 수 있다.
전국 산악회에서 묶어 둔 리본이 바람에 흔들리고
다시 언덕길을 오른다. 구름층이 얇아지면서 하늘빛이 맑아진다. 도중에 커다란 바위가 길옆으로 머리를 내민 곳이 있으니 자연 삼매경도 좋지만, 안전에도 신경을 쓰며 걷는 게 좋다. 전국 산악회에서 소나무 가지에 묶어 둔 리본이 경쟁적으로 달린 곳을 지나면 물소가죽을 연상시키는 바위와 맞닥뜨린다. 검거나 희거나 붉은빛이 도는 바위는 봤지만 이런 고급스러운 빛을 띤 건 처음이라 진기한 마음에 한참을 그 앞에 서 있다.
해녀 조형물
바윗돌과 흙길, 나무 난간 길을 얼마나 걸었을까 솔향과 바다 내음에 심신이 편안해질 무렵 해변에 세워진 해녀 조형물과 만났다. 미역이 유명한 석리와 노물리 여인이 물질할 때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 다시 길은 이어지고 낡은 초소를 지나면 사람 형태의 괴석이 보인다. 보통 사람이 아니라 노스님의 뒷모습이다. 승려복을 입고 수평선을 바라보며 목탁을 두드리는 것 같다. 영덕의 안녕과 발전이 보이지 않는 곳의 영험한 기운에서 나온 건 아닐까.
그림같은 석리해변
경정리 방파제
석리마을은 야트막한 산기슭에 층층이 지어진 집이 특히 예쁘다. 집들이 서로 머리를 맞댄 채 다닥다닥 붙어 있는 모양이 갯바위에 붙은 따개비 같다 하여 ‘따개비 마을’로도 불린다. 경정리 어촌은 소박했지만 해안가엔 표고버섯 모양을 한 돌들이 납죽납죽 엎드려져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자연 발생적 아름다움에 오묘한 멋까지 갖추어 규모는 작지만 베트남의 하롱베이 를 떠올리게 했다.
해풍에 말라가는 청어 과메기
이쯤에서 과메기 얘기를 하고 가야 하지 않을까 싶다. 게와 더불어 과메기 철이라 해풍에 꾸덕꾸덕 말라가는 과메기를 볼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기온이 높아서일까 덕장 구경하기가 힘들었다. 다행히 경정리 마을 입구에서 줄에 주렁주렁 걸린 과메기를 보았다. 쫀득하고 고소한 식감이 느껴져 반가웠다. ‘관목청어(貫目靑魚)’로 불렸던 청어는 조선시대 후반 포항과 영덕 일대의 바닷가에서 많이 잡혔다. 지금은 꽁치를 많이 쓰지만 두 눈이 마주 보일 정도로 맑은 청어를 꿰어 말린 데서 유래되었다는 말이 있다.
백악기 암석
경정1리에서 차유마을 가는 길에 지질공원이 있다. 약 1억 년 된 이암과 사암이 해안가에 널리 분포되어 있는데 차유마을 쪽에서는 붉은 이암이, 경정마을 쪽에서는 붉은 이암과 흰 이암이 분포되어 있다. 여러 암석이 어우러진 모습이 이색적이다. 암석을 통해 과거의 다양한 흔적을 유추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

드디어 대게 원조마을인 경정2리에 도착했다. ‘차유마을’로도 불리는 이곳은 고려 29대 충목왕 때 영해부사 일행이 수레를 타고 고개를 넘어왔다고 해서 수레 ‘차’(車), 넘을 ‘유’(踰)를 써서 차유마을로 불린다. 마을 입구 언덕에 대게 원조비와 함께 팔각정이 세워져 있다. 대게는 다리 모양이 대나무처럼 곧고 마디가 있어 ‘대(竹)게’라 불린다.
부드러운 곡선의 축산해변
이번 여행의 마지막 코스인 축산항을 향해 열심히 걷는다. 바다를 끼고 야트막한 언덕을 하나 넘는다. 발아래로는 파도가 철썩이고 피톤치드 효능에 마음까지 상쾌하다. 도중에 숲길과 모래길 갈림길이 나온다. 취향에 따라 선택하면 된다. 모래 입자가 정말 고와 맨발로 뛰어다니고 싶을 정도다. 조용하고 한적해서 사색의 길이라 이름 붙여도 좋겠다.

말미산을 벗어나니 부드러운 곡선으로 둥글게 휘어진 축산 해변과 죽도산 전망대가 눈앞으로 성큼 다가선다. 블루로드 다리는 고고한 죽도산과 어우러져 장엄한 풍경으로 완성된다. 축산천이 바다로 흘러드는 모래톱엔 갈매기 떼 한가롭고 블루로드 다리는 저녁노을 받아 환상적이다. 아름다운 항구로 알려진 축산은 그 형상이 소를 닮아 축산”이라 불리며 마을에 들어가 보면 크지는 않지만 대게처럼 속이 꽉 찬 항이란 게 느껴진다. 산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어 좋은 에너지가 항구에 소복이 고여 있는 것 같다.

▲ 글·사진 임수진 작가

◇ 여행자를 위한 팁

영덕 해맞이공원에서 축산항으로 이어지는 해파랑길 21코스는 블루로드 B코스와 연계되어 있다. 환상의 바닷길과 숲, 온갖 종류의 기암괴석을 만날 수 있어 힐링과 마음 치유에도 효과적. 하늘과 바다와 산과 사람과 지질공원은 물론 청룡과 백호의 기까지 받을 수 있는 환상의 도보 코스다. 이곳은 도중에 길을 잃을 염려도 거의 없다. 해안선 따라 줄곧 걸으면 되고 표식도 잘 되어 있다. 노물리와 석리, 차유마을에서 송림 숲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만 조금씩 신경 쓰면 된다.


여러 형태의 괴석
갈매기 한 마리가 동네를 살피고 있다
노물항에서 바라본 풍력발전소
세월을 낚는 사람들
경정리 어항
경정리 해변
해풍에 말라가는 청어 과메기
대게 원조비
축산항에서 바라다 본 죽도산 전망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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