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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선규 대구교대교수
좀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청년 시절에 소설이라는 것을 쓰겠다고 작심한 뒤 한참 동안, ‘무엇을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해서 철두철미하게 생각해 본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요행으로 소설가가 된 뒤에도 학술적이든 문예적이든, 일목요연하게 글쓰기에 대한 저의 생각을 정리해서 밝혀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저 ‘닥치는 대로’ 써왔습니다. 생각해서 쓰기보다는 손 가는 대로 쓰는 것을 즐겼습니다. 아마 습작기의 어느 순간에 ‘신천지가 목전(目前)에 전개되는 듯한 느낌’을 한 번 경험한 탓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철들고 오매불망 글쓰기를 염원했지만 쉽사리 글쓰기의 문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팔만근은 족히 나갈 무거운 철문(鐵門) 하나가 떡하니 가로막고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한순간에 사라진 것입니다. 갑자기 문안 풍경이 제 눈앞에 훤하니 펼쳐지는 거였습니다. 마음이 편안해 지면서 이것저것 가리고 따지는 불편한 심기가 사라진 것도 그때였습니다. 그 뒤로는 글쓰기가 한결 수월해졌습니다. 굳이 설명하자면 ‘역지사지(易地思之)’를 좀 알게 되고, 그동안 벗으면 죽는 줄로만 알고 있던 철가면(鐵假面) 하나를 벗어던지게 된 것입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마치 말문이 터진 어린아이처럼, 이것저것 쓸 것들이 마구 쏟아져 나왔습니다. 원고지 채우기 급급했던 지난날들을 까맣게 잊고 하루하루 바쁘게 글을 써내기 시작했습니다. 기억에, 그때는 퇴고도 제대로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제가 쓴 것이 아니라 제 손을 빌려 다른 누군가가 쓴 것이니 구태여 내가 손을 댈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때 글들을 지금 보면 거칠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독자를 배려하는 마음보다 스스로를 발견하는 기쁨이 먼저였습니다. 좀 더 신중히, 하늘이 내린 선물을 흠향(歆饗·신명이 제물을 받음)하지 못했던 것이 후회됩니다.

수업에 필요할 것 같아서 ‘사회과정 중심 글쓰기 : 작문교육 패러다임의 전환’이라는 책을 읽다 문득 그 옛날의 추억이 떠올랐습니다. 아직도 제게는 ‘조목조목 가리고 따지는’ 설명이 불편합니다. 아는 것이 실천의 의무를 면제해 줄 수도 있다는 헛된 믿음을 그것들이 부추기는 것 같아서 싫습니다. 그와 관련해서 오늘은 공자님이 말씀하신 군자불기(君子不器)라는 말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일반적으로 그 말의 뜻은 다음과 같이 이해됩니다.

* 군자는 일정한 용도로 쓰이는 그릇과 같은 것이 아니라는 뜻으로, 한 가지 재능에만 얽매이지 않고 인생만사 두루 살피고 원만해야 한다는 말.

* 바람직한 지식인은 스페셜리스트이면서 동시에 제너럴리스트가 되어야 한다는 말.

* 군자는 한낱 도구적인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바람직한 인간 존재는 덕과 인, 지식과 실천력을 겸비한, 자목적적(自目的的)인 통일체라야 한다는 말.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올수록 설명이 점점 추상적입니다. 마지막의 ‘자목적적인 통일적 존재’라는 말은 제가 만들어 본 것입니다. 현재 저의 생각으로는 그것이 가장 유용한 현대적 해석인 것 같습니다. ‘도구(器)’라는 말을 무엇의 ‘수단(적 존재)’이라고 본 해석입니다. 군자(이상적 인간 존재)는 그것(수단적 존재성)을 뛰어넘어 스스로가 존재의 목적이 되는 경지를 지향해야 합니다. 그래야 무엇이든 유용한 것을 이룰 수 있습니다. 세상에 기여도 하고 자기를 희생도 합니다.

글쓰기 공부에 관련해서 그 해석을 활용해 보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역지사지, 견물생심(見物生心)’입니다. 자기(self)를 해체하고, 오직 보이는 것에 충실해야 합니다. 내 안의 욕심이 바깥으로 함부로 나대는 것을 막아야 합니다. 무용지식(無用知識)의 유혹을 끊고 부단히 쓰기를 반복하면서 스스로 자목적적인 존재가 되기를 노력해야 합니다. 군자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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