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사람이 빚은 선경에서 ‘성리학 성지’를 꿈꾸다
그의 암서재 중수기는 당시 풍광을 잘 담고 있다. “석대 아래로는 깊은 못이 있어서 뗏목은 물론 자그마한 배로 띄울 만하다. 때때로 한 조각 작은 배를 띄우고 물살을 따라 오르락 내리락 하다 보면 밑바닥이 훤히 보일 정도로 물이 맑아서 헤엄쳐 다니는 물고기를 하나 둘 셀 수 있다. 밤에 서재 창가에 기대어 있자면 달빛이 대낮처럼 환하고 영롱하게 세상을 비추고 있어 마치 수정의 세계에 들어와 있는 듯했다. 이때 우암 선생이 지팡이를 끌고 시를 읊으면 금석이 내는 소리처럼 울려 퍼져서, 문득 세상 바깥에 서 있는 듯한 생각이 들곤 했다. 주자가 무이산에 세운 무이정사의 맑은 정취와 비교하면 어느 쪽이 더 낫다고 할 수 있을까?”
세월이 흐르자 효종의 장지가 잘못 정해졌다며 송시열을 탄핵하는 상소가 잇따른다. 결국 낙향해 소제동으로 돌아왔다가 화양동에 암서재를 짓고 2년간 칩거했다. 그는 1674년 승하한 현종의 지문을 써달라는 숙종의 명을 수차례 거부하다가 포항 장기와 거제도에 유배됐다. 가시나무로 울타리를 친 위리안치였다. 이후 청풍에 이배(移配)됐다가 1680년에 다시 화양동으로 돌아왔다. 그 후 영중추부사 봉조하 등의 벼슬에 올라 화양동을 떠났다가 1688년을 끝으로 다시는 화양동에 돌아오지 못했다.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완전히 실권을 한 뒤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쓰러졌기 때문이다.
암서재는 집을 짓고 살기에는 적당한 장소가 아니다. 우선 강을 건너야 하는데 배를 타야 했고 가파른 바위를 힘겹게 올라야 한다. 비가 와서 강물이 불어나거나 눈이라도 와서 쌓이면 통행이 거의 불가능해진다. 그러나 경치는 숨이 막히도록 아름답다. 발아래 펼쳐진 강에는 기암괴석이 즐비하고 정면에는 낙영산 중턱에 우뚝 선 첨성대가 눈에 들어온다. 송시열은 첨성대에 올라 천문지리를 관찰하거나 화양구곡을 거닐며 시를 읊었다.
그 사이에 집 한 칸을 지었다.
고요히 앉아 경전의 뜻을 배우며
시간을 아껴 높은 곳에 오르노라
- 송시열의 시 ‘화양동 바위 위의 정사에서 짓다’
송시열은 효종의 기일에 암서재 아래 바위에 엎드려 통곡을 했다. 그 바위가 읍궁암이다. 대궐을 향하여 활처럼 엎드려 울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고 ‘옛날 중국 형호에서 황제가 죽자 신하들이 황제가 남긴 활을 잡고 울었다는 고사에서 빌려온 것’(이종묵의 ‘조선의 문화공간’)이라고도 한다.
송시열은 조선왕조실록에 이름이 3,000번 정도 거론될 정도로 논란의 중심에 선 인물이다. 평가가 극명하게 엇갈린다. 조선의 유학자 중에서 유일하게 공자나 맹자, 주자와 같은 반열인 ‘송자’로 추앙을 받았다. 중국의 명나라가 망하고 오랑캐라고 여기는 청나라가 들어선 마당에 주자학의 적통은 조선이 이어받았고 그 중심에 서인과 송시열이 있었다. 그는 평생 주자학을 수호하는 것으로 정권을 쥐고 흔들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피폐해진 나라를 예학으로 일으켜 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백성은 백성답게 예의를 바탕으로 역할을 수행하고 지켜 감으로서 나라의 근본을 잡아야 한다고 믿었다.
송시열에 의해 죽음을 당한 대표적인 인물이 ‘회니시비(懷尼是非)’로 유명한 백호(白湖) 윤휴(1617~1680)다. 송시열보다 10살 연하였던 윤휴는 주자만이 세상의 모든 진리라는 송시열에 맞섰다. 주자를 제치고 공자와 맹자를 읽고 “천하의 이치란 한 사람이 모두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며 자신만의 독창적인 경전해석을 내놓았다. 경신환국이 일어난 1680년 5월 20일 서인이 정권을 다시 잡았다. 송시열은 윤휴를 사사했다. 64세였다. 윤휴는 죽으면서 마지막 말을 글로 남기려 했으나 거부당했다. 그러자 “뜻이 다르면 쓰지 않으면 그만이지 죽일 것 까지 없지 않은가”라는 말을 남기고 약사발을 마셨다. 9년 뒤 1689년 서인이 실각하고 남인이 집권한 기사환국으로 송시열도 사약을 받았다. 숙종과 장희빈 사이에 난 아들을 원자로 책봉하는데 반대하다가 제주도에 유배를 갔다. 국문을 받기 위해 서울로 압송되던 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생을 마감했다. 그의 나이 83세 때다. 송시열의 흔적은 암서재 외에도 논산의 팔괘정 임이정 남간정사 우암고택 등이 있다.
<독자 여러분의 사랑을 받아 온 ‘정자’ 연재를 100회 ‘암서재’를 끝으로 마감합니다. 그간 애독자 여러분의 성원에 감사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