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대통령과 함께 뒤늦게 입장했다가 착석 않고 5분만에 퇴장

문재인 대통령이 9일 오후 강원도 용평 블리스힐스테이에서 열린 올림픽 개회식 리셉션에서 북한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비롯한 각국 주요 정상들과 자리를 함께하고 있다. 왼쪽부터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 김영남 상임위원장, 토마스 바흐 IOC위원장, 문 대통령, 김정숙 여사, 슈타인마이어 독일 대통령 부부, 아베 신조 일본 총리. 연합
문재인 대통령이 9일 평창동계올림픽 참석차 방한한 주요 정상급 인사들을 초청해 개최한 리셉션 행사에서 역내 안보협력 파트너에 해당하는 미국과 일본이 사실상의 ‘외교적 결례’를 범했다.

뚜렷한 이유 없이 리셉션 행사장에 늦게 참석한 데다 행사 도중에 자리를 뜨는 등 전례를 찾기 힘든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북한이 대화를 위한 여건 조성에 적극성을 보이지 않는 한 대북 압박 기조에 전혀 변함이 없을 것이라는 분명한 메시지를 보내는 동시에, 북한이 뚜렷한 비핵화 의지를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남북간 대화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는 데 대한 ‘외교적 불만’을 표시하는 차원에서 고도로 계산된 행동을 했다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용평리조트에서 열린 리셉션에서는 본 행사에 앞서 오후 5시 17분부터 행사에 도착하는 정상들을 문 대통령이 일일이 맞이하는 영접(리시빙) 순서가 예정돼 있었다.

토마스 바흐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 내외를 시작으로 마크 루터 네덜란드 총리와 김영남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등이 문 대통령과 악수하고 행사장으로 들어갔다.

본 행사 시작 시각인 오후 6시가 될 때까지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과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오지 않았고 오후 6시 4분에 ‘리시빙’ 행사는 마무리됐다.

문 대통령과 귀빈들은 조금 더 기다리다가 오후 6시 11분에 본 행사를 시작했고 문 대통령의 환영사, 바흐 위원장의 건배사 등이 이어졌다.

행사가 시작할 때쯤 행사장에 도착한 펜스 부통령과 아베 총리는 곧바로 입장하지 않고 별도로 마련된 공간에서 기다리다가 사진을 찍은 것으로 알려졌다.

오후 6시 30분께 바흐 위원장의 건배사까지 들은 문 대통령은 펜스 부통령과 아베 총리가 머무르던 방으로 가서 애초 예정됐던 ‘한미일 포토세션(공동기념촬영)’을 진행했다.

세 사람은 오후 6시 39분에 나란히 리셉션장으로 들어갔다. 문 대통령과 아베 총리는 행사장에 착석했지만, 펜스 부통령은 김영남 상임위원장을 뺀 채 다른 나라 정상급 인사들과만 악수한 채 5분 뒤 행사장을 떠났다. 다만 아베 총리는 펜스 부통령과 달리 헤드테이블에 착석해 김 상임위원장과 악수하며 인사했다고 청와대는 전했다.

펜스 부통령과 아베 총리의 ‘지각’을 두고 일각에서는 김 상임위원장과의 악수하게 되는 상황을 일부러 피함으로써 외교적 불만의 메시지를 행동으로 전하려 한 게 아니냐는 분석을 내놓는다.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대북 제재·압박에 한미일이 공조를 다짐한 상황에서 평창동계올림픽을 앞두고 급속히 진행된 남북 ‘해빙 무드’가 못마땅했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두 사람은 방한에 앞서 가진 자국 언론과의 인터뷰, 방한 후 문 대통령과의 만남에서 한결같이 최고 수준의 대북 제재·압박의 필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이들은 사전 영접행사에 참석해 같은 공간에서 김 상임위원장과 대기하다가 본 행사에서 악수하고 건배까지 하는 상황도 불편했을 수 있다.

특히 펜스 부통령의 경우 이날 탈북자 면담, 천안함 기념관 방문 일정을 통해 북한의 ‘폭정’을 강하게 비판한 데 이어 리셉션 행사장에서의 행보를 통해 현 국면에서 우리 정부가 희망하는 북미대화 가능성에 확실히 선을 긋겠다는 의지를 보였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런 분위기는 평창동계올림픽 개회식에서도 이어졌다.

참가국 중 마지막으로 남북 선수단이 한반도기를 앞세워 동시에 입장할 때 문 대통령 내외와 북한 대표단은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흔들며 선수들을 반겼다.

선수단 입장이 끝날 때쯤 문 대통령은 뒤에 앉아 있던 김 상임위원장, 김여정 북한 노동당 중앙위 제1부부장과 반갑게 악수했다.

이와는 반대로 펜스 부통령은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은 채 중앙 무대 쪽을 응시하거나 미국 대표단 관계자와 이야기하는 등 남북의 ‘화기애애한’ 모습을 애써 외면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이 때문에 개회식에서 볼 수 있으리라 기대됐던 ‘북미 대화’의 분위기는 조금도 읽을 수 없었다.

아베 총리 역시 입을 다문 채 묵묵히 자신의 자리에 앉아 문 대통령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미국과 일본이 이처럼 북한과의 접촉을 아무리 피하고 싶었다 하더라도 전 세계인의 스포츠 축제인 동계올림픽 개막을 축하하러 온 자리에서 이 같은 행동을 한 것은 외교적으로 결례라는 게 대체적인 반응이다.

청와대도 미국과 일본 정상급 인사의 이 같은 행동에 외교적으로 보다 정교하게 대응했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윤영찬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은 기자들에게 보낸 메시지를 통해 “펜스 부통령은 미국 선수단과 오후 6시 30분에 저녁 약속이 있었고 우리에게 사전 고지가 된 상태였다”며 “그래서 테이블 좌석도 준비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윤 수석은 “(펜스 부통령은) 포토 세션에 참석한 뒤 바로 빠질 예정이었으나 문 대통령이 ‘친구들은 보고 가시라’고 해서 리셉션장에 잠시 들른 것”이라고 전했다.청와대는 이를 언론에 미리 알리지 않은 채 펜스 부통령이 퇴장한 이후 오후 7시가 넘은 시점에 알렸다.

청와대의 해명과 달리 행사 시작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시점까지 펜스 부통령 내외의 좌석에는 두 사람의 자리임을 알리는 좌석 명패가 남아 있었다.

한편, 김 상임위원장 옆에 앉은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통역을 요청해 “평양 방문 때 음식이 맛있었다. 건강에 좋다는 인삼을 가져가 부친께 드린 적이 있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김 상임위원장은 “조선 음식이 건강식이라 유럽 사람에게 잘 맞는다”고 했다고 화답하는 등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보였다.

연합
연합 kb@kyongbu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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