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북 제안에 "여건 만들어 성사시키자"…북미대화 중재외교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숙 여사가 9일 평창 올림픽스타디움에서 열린 2018 평창동계올림픽 개막식에서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 뒤로 북한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김여정 북한 노동당 중앙위 제1부부장이 자리하고 있다. 옆에는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 내외와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자리하고 있다. 연합
북한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이 10일 문재인 대통령에게 방북초청이라는 ‘파격 카드’를 제안하면서 문 대통령이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한반도 평화외교’가 중대국면을 맞았다.

김정은 위원장이 지난 2012년 자신의 통치체제를 구축한 이래 남한 최고지도자에게 평양 방문을 초청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는 문 대통령을 ‘카운터파트’로 삼아 경색된 남북관계를 풀고 이를 토대로 한반도 정세대응의 틀을 새롭게 바꿔보겠다는 나름의 ‘통 큰’ 의지가 작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김 위원장의 ‘특사’인 김여정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이 문 대통령에게 전달한 ‘친서’(親書)는 김 위원장의 “남북관계 개선 의지”를 담았다는 게 청와대의 강조점이다.

이에 따라 그간 남북관계 개선을 북핵문제 해결과 한반도 평화정착의 마중물로 삼겠다고 천명해온 문 대통령으로서는 전례 없는 ‘긍정적 환경’을 맞았다는 분석이 나온다.

2000년 김대중 대통령과 2007년 노무현 대통령에 이어 한반도 문제를 놓고 북한 최고지도자와 ‘일 대 일’로 대화하는 ‘정상회담’ 기회를 갖는다는 것은 문 대통령이 자신의 임기내에 ‘한반도 평화구상’이라는 퍼즐을 맞춰나가는 데 있어 가장 핵심적인 ‘조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문 대통령은 김정은 위원장의 제안을 즉각적으로 수락하지 않은 채 “여건을 만들어 성사시켜나가자”며 신중하게 대응했다.

문 대통령이 여기서 언급한 ‘여건’의 핵심은 북핵문제의 진전이다. 남북이 ‘정상 차원’의 담판을 통해 큰 틀에서 관계개선을 이뤄보자는 뜻에는 공감하지만, 한반도 최대현안인 북핵문제가 해결기미를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무작정 정상회담을 하는 것은 의미있는 성과를 낳을 수 없다는게 문 대통령의 판단이기 때문이다.

문 대통령은 지난달 10일 신년 기자회견에서도 “여건이 갖춰지고 전망이 선다면 언제든지 정상회담에 응할 생각이 있다”면서 “남북관계 개선과 함께 북핵문제 해결을 이뤄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문 대통령이 북핵문제의 진전을 방북의 ‘조건’으로 삼고 있는 것은 한반도 비핵화 목표의 추구라는 국내 정책적 측면과 함께 동맹국이면서 한반도 문제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미국과의 현실적 ‘공조’를 감안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미국은 이번 평창올림픽을 고리로 한 남북관계 개선을 지지하면서도 비핵화를 전제하지 않은 북미대화에는 응할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대리인으로 평창을 찾은 마이크 펜스 부통령은 오히려 북한의 핵포기를 향해 “최대한의 압박”을 가해야 한다는 점을 누차 강조했다.

문 대통령 역시 북한의 비핵화가 한국과 미국의 공동목표로서 양국의 ‘빈틈없는 공조’를 통해 북한을 비핵화 대화의 장으로 끌어내야 한다는 확고한 인식을 갖고 있다는 게 청와대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문 대통령이 김여정 특사를 매개로 한 김정은 위원장과의 간접대화에서 북미대화의 조기 개최를 강조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문 대통령은 “남북관계 발전을 위해서도 북미 간에 조기대화가 필요하다”며 “미국과의 대화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주문했다.

남북대화와 함께 비핵화를 전제로 한 북미대화가 ‘선순환적’으로 맞물려 돌아가야 유의미한 남북정상회담이 가능하다는 ‘메시지’라는 풀이가 나온다. 여기에는 김정은 위원장의 제안으로 한미 간 공조에 ‘균열’이 발생할 소지를 차단하려는 의도도 담겨있는 것으로 보인다.

문 대통령이 이날 김정은 위원장의 파격 제안을 즉각 받아들이지 않고 북미대화를 강조한 대목은 북미 사이에서 다시금 ‘중재외교’에 박차를 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평가다.

물론 문 대통령은 김여정 특사를 비롯한 북한 고위급 대표단과의 접견에서 ‘핵’ 문제를 비롯한 민감한 현안을 거론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북미대화를 거론한 것 자체가 핵 문제에 대한 태도변화와 비핵화의 진전이 반드시 선행돼야 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주목할 점은 ‘공’을 넘겨받은 북한이 문 대통령의 요청을 받아들일지 여부다. 김정은 위원장이 ‘핵무장 완성’을 주창하면서 핵주권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보여왔다는 점에서 문 대통령이 제안한 북미대화에 호응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관측이다.

적어도 핵포기 의사를 밝히고 기존 핵 프로그램을 동결하는 것을 ‘대화의 입구’로 삼고 있는 한미 양국과는 당장 ‘접점’을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정은 위원장이 남측을 상대로 ‘친서외교’까지 하고 나선 데에는 국제제재에 따른 현재의 고립국면을 타파하고 대외전략의 틀을 크게 변화시켜보려는 의도가 있다는 분석이 적지 않다. 이날 접견과 오찬회동에서 북한 대표단도 ‘한미 군사훈련’ 등 예민한 문제를 거론하지 않은 것도 변화 의지가 반영돼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따라서 북한의 전략적 계산과 문 대통령의 ‘주선’에 따라서는 북미대화의 문(門)이 완전히 닫혀있다고 볼 수 없다는 관측이 대두하고 있다.

특히 다시 ‘운전대’를 잡은 문 대통령으로서는 앞으로 고위급 대북특사 파견과 주변국과의 공조를 통해 북한의 태도변화를 견인해내기 위한 외교적 노력을 강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다만 문 대통령은 앞으로 북한을 지나치게 자극하거나 압박하는 모양새는 피할 것으로 보이고, 대화 가능성을 봉쇄한 채 대북 압박과 제재에만 몰두하는 일본과는 확실한 거리두기를 시도할 것으로 예상된다. 9일 한일 정상회담에서 ‘한미 군사훈련을 예정대로 실시하라’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요구에 대해 “내정문제를 직접 거론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쐐기를 박은 것은 이런 차원으로 풀이된다.

문 대통령으로서는 남북관계에서 본격적으로 불기 시작한 평창발(發) 훈풍의 불씨를 최대한 살려 북미대화로까지 확산시켜나가는 것이 당면한 최대 과제로 떠올랐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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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 kb@kyongbu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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