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종석 새경북포럼 구미지역 위원 정치학박사.jpg
▲ 윤종석 구미지역위원회 위원 위원·정치학 박사
성폭력 피해여성들이 자신의 피해 경험을 SNS를 통해 잇달아 고발하며 시작된 ‘MeToo (나도 당했다)’는 그동안 사회 여러 곳에서 만연했던 권력형 성폭력 사건들을 주목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보수적이고 가부장적 권위주의 시대의 산물인 남성중심의 사회생활에서 빚어지는 권력형 성폭력은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 관대하며 여성차별과 남성우월의식이 잔재한 우리 시대 또 하나 버려야 할 부끄러운 과제이다.

지방청에 근무하는 여검사가 자신의 성폭력 피해를 검찰 내부통신망에 폭로하면서 시작된 파장이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다.

고위간부의 성추행 악몽으로 무려 8년 동안을 정신적 고통 속에서 시달려야 했던 트라우마는 부끄럽고 생각하기도 싫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격적인 경험을 침묵하지 않고 고발할 수 있었던 용기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마지막 고육책으로 풀이된다.

남자의 권력과 재력이 여성에 대한 편력으로 작용하던 시절, 비교적 성희롱과 성추행에 관대한 사회적 분위기가 그럴 수 있다는 불문율을 만들었다. 또한, 사회 전반에 걸친 성폭력과 관련된 사안들은 출세주의와 왜곡된 남성중심의 조직문화에서 일반화되어 왔으며 비단 검찰조직에서만 아닌 사회 전반에 걸친 묵시적 관행이었다. 그 결과 성추행으로 인해 국격의 손상까지도 감수한 큰 사건들도 가해자가 남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잠시 뉴스거리가 되었다가 슬그머니 사라지는 교조문화를 만들어왔다. 그러나 그동안 말하지 못했던, 그리고 말했지만 덮여버렸던 과거 사건들이 하나둘 고개를 들기 시작하면서 사회 전반에 대한 분위기가 과거와 같지 않다는데 긴장을 한다. 상대방 의사와 관계없이 아무렇지도 않게 스스럼없이 대하는 행동이 상대에게 심한 성적 수치심과 혐오로 깊은 상처를 주었다면 분명한 성추행이며 범죄이다. 그런데도 정작 다수의 가해자는 성폭력으로 인식하지 않고 있으며, 억울하다거나 기억이 없다는 변명으로 일관해 사건을 은폐해왔던 것이 일반적이다. 이번 성폭력 피해 폭로사건은 그동안 제보에 의한 많은 범죄사건을 두고도 진상 규명보다 제보자 색출에 나섰던 과거에 비하면 훨씬 비약적이다. 익명보다도 실명과 자신의 얼굴까지도 내비치는 당당함은 과거와 달라진 사회적 정서와 분위기이며, 그동안 무의식적으로 행동하던 자신의 삶들을 되돌아보는 시너지효과를 가져왔다.

상대의 의사와 관계없이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는 성폭력 문화는 우리 사회의 일그러진 자화상으로 근절되어야 한다. 상대의 의사에 반하는 행동은 강제추행이나 다름없다. 그동안 술에 관대한 우리의 음주문화로 인해 빚어진 사고나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상대를 항거불능으로 만들어 발생하는 성폭력은 드러나지 않고 무마해 온 것이 관례였다.

‘역지사지’란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라는 한자성어이다. 내가 중심이 되어 사는 사회생활 속에서 나로 인해 상처받는 일들이 상대가 아닌 나라면 어떻게 될까, 만약 성폭력에 희생되는 대상자가 내 자식, 내 가족이라면 침묵하며 감수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피해자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와 트라우마를 가져오는 성범죄 피해는 우리 모두가 잠재적 피해대상이다. 따라서 뿌리 깊고 끊임없이 대두하고 있는 성폭력은 추방되어야 마땅하며, 사건의 재발을 막기 위한 대책 마련의 제도적 시스템의 혁신을 서둘러야 한다.

공동체 사회의 구성원인 우리 모두의 무관심이 ‘방관자 효과’를 만들어 성폭력을 비롯한 많은 사건 사고들을 재생산하고 있다. 위계질서의 상하관계에서 약자의 항거불능을 무관심으로 방관하는 것은 일종의 공범이다. 빙산의 일각일 수도 있을 이번 사건이 ‘성 인권변화’의 기폭제가 될 수 있도록 구경꾼을 넘어 피해자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역지사지’의 실천이 사회를 바꾸는 힘의 원천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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