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들의 핏값이니 잘못되면 영일만에 모두 빠져 죽자"

박정희대통령과 KISA대표단 면담.(국가기록원)
“조상들의 핏값이니 잘못되면 우향우해서 영일만에 모두 빠져 죽자”

역사적으로 볼 때 거대한 국가 대역사는 난관을 극복하고 나면 다시 또 다른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고, 그 어려움을 이겨낼수록 추진력은 더 강해졌다. 단군 이후 가장 큰 국가대사 였던 종합제철건설사업 역시 철(鐵)이 담금질을 통해 더 강해지듯 여러 차례 고비를 넘겼다.



1, ‘돈 줄’이 바뀌다_ 결국 등 돌린 KISA

부지매입과 부지조성 착수에 이어 박태준 사장이 위원장을 맡은 <종합제철사업추진위원회>가 가동되면서 종합제철 프로젝트는 내부적으로 활발하게 돌아가고 있었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돈 줄’ 즉, 재원조달은 겉돌고 있었다.

KISA(대한국제제철차관단)에 대한 논의는 1965년 5월부터 시작됐다. 박정희 대통령이 미국 피츠버그 철강단지를 방문, 코퍼스의 포이회장을 만난 자리였다. 포이는 한국의 제철소 사업에 큰 관심을 보이면서, 건설자금은 국제제철차관단을 만들어 조달하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했던 것이다. 물론 최대한 협력할 것도 약속했다.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7년~1971년)을 준비하고 있던 우리 정부는 철강산업에 대해 강한 의지를 보이고 있었다. 경제사정으로 볼 때 국내 자금으로 제철소를 짓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이미 미국의 협조 약속을 받아놓은 상태였지만, 일본의 의사를 타진하는 한편 세계은행(IBRD)에도 협조를 구하는 등, 차관도입을 위해 가능한 채널을 총동원했다

우여곡절 끝에 미국·서독·이탈리아·영국·프랑스 등 5개국 8개사로 KISA를 구성됐고 KISA 회원국이 1억달러, 우리나라가 3500만달러를 부담한다는 조건으로 마침내 종합제철 건설이 추진되었다.

1966년 12월, 이른바 KISA(Korea International Steel Associates : 대한국제제철차관단)가 정식 발족했다.

미국의 코퍼스가 주축이 돼 미국의 철강사인 블로녹스, 웨스팅하우스 등 3개사, 독일 데마그, 지멘스 등 2개사, 영국의 웰먼, 이탈리아의 임피안티 등 4개국 7개사가 모였고, 이들은 12월 6일부터 며칠 동안 회의를 거듭한 끝에 한국의 종합제철사업을 지원한다는 내용에 합의, 첫발을 내디뎠다. 한 달쯤 후에는 프랑스의 엥시드가 합류, 차관단은 결국 5개국 8개사로 늘어났다.

KISA는 1967년 1월과 3월에 잇달아 총회를 열고 제철소 규모와 자금 동원 등에 대해 논의하고 대표단이 방한해 타당성 조사도 벌였다. 그리고 4월 6일, KISA대표 포이 회장과 장기영 부총리가 ‘종합제철 건설 가협정’을 체결했다. 조강 기준 100만 톤 규모로, 두 차례로 나누어 1970년과 1976년에 각각 50만 톤 규모의 제철소를 건설한다는 내용.

기본협정까지는 산 넘어 산이었다. 조강규모, 건설자금, 각종 조건 등 밀고 당기는 교섭이 계속됐다. 예정 기한인 7월을 훨씬 넘겨 10월초에야 개괄적인 합의가 이루어졌다. 1967년 10월 20일, 마침내 KISA와 우리 정부 사이에 <종합제철 건설에 관한 기본협정>이 체결됐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자금조달 부분이 모호하게 처리돼 있었다. 주로 기술용역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다. KISA 회원사들의 책임이 명확하지 않았다. 자금규모와 조달 시기, KISA 회원사들 사이의 지원자금 배분 문제 등이 명시되지 않은 채, 차관 확보를 지원한다는 애매한 문구뿐이었다. KISA 회원사들을 법적으로 구속할 수 있는 조항은 전혀 없었다. 뿐만아니라 기본설계 후 한국 정부와 KISA가 자금조달을 위해 협력하되, 여의치 않으면 상호 아무런 책임 없이 자동 해약하게 돼 있었다.

포항제철소협상 난항을 보도한 일간 신문
차관실패를 다룬 신문보도(1969.5 동아)
제일 먼저 이 부분을 지적한 것은 박태준 사장이었다. 그러나 정부는 협정체결이라는 성과에 지나치게 급급했다.

결국 우려는 현실로 나타났다. 우선 1년 넘게 KISA와 별 소득없는 지리한 협상이 이어졌다. 외자 1억900만 달러 중 도입이 확정된 것은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를 합해 4,300만 달러에 그쳤다. 미국과 서독은 차관공여를 기피했다. 같은 해 11월, 최악의 상황이 벌어졌다. 차관공여 주체인 미국 수출입은행이 세계은행(IBRD)에 한국 정부의 차관요청에 대한 심사를 의뢰했으며, IBRD는 한국의 종합제철사업에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은 것이다. KISA는 곧바로 IBRD의 전망에 반응을 보였다. IBRD 보고서 내용을 인용하면서 한국의 제철소는 경제적 타당성이 없다는 것이었다.

정부와 포스코는 있는 힘을 다해 설득에 나섰다. 정부측 협상단과 포스코의 실무협상단이 피츠버그로 달려갔다. KISA 회원사들을 따로따로 만나 한국의 경제 상황과 제철소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러나 그들은 잘라 말했다. “KISA는 제철소 건설자금을 지원할 수 없다”는 것

그 즈음 그들의 약속만 믿고 영일만에서는 수천 명이 삶의 터전을 버리고 고향을 떠난 채 정든 집을 헐고 수백만 평에 부지를 조성하고 있었다.

결국 KISA와의 기본협정은 1969년 9월 2일 자로 자동해지 됐다. “KISA가 확정재무계획을 제출한 날로부터 200일 이내에 차관을 조달하지 못하면 계약이 자동해지된다”는 계약조항에 따른 것. 9월 4일 KISA의 대표가 계약해지를 알리는 공문을 보냈으며 수년 동안 KISA와 함께 추진해오던 종합제철 프로젝트가 공식적으로 막을 내리게 된 것이다. KISA라는 명칭 또한 우리 철강산업사의 무대 뒤로 사라졌다.

1969 한일기본협약체결.
2, ‘하와이 구상’과 대일청구권 자금

KISA와 결별한 정부와 포항종합제철은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했다.

박태준 사장은 KISA의 거절에 낙담한 채 돌아오는 길에, 이른바 ‘하와이 구상’을 통해 회생의 길을 마련한다. 대일청구권자금을 전용, 제철소 건설자금 1억 달러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박 사장은 정부의 동의를 얻어 대일 로비를 벌였다. 일본의 철강업계, 경제계, 정치계 인사들을 만나 한국이 제철소를 짓게 도와야 한다고 설득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지시에 따라 종합제철사업 계획연구회가 결성되고 연구회는 대내외에 종합제철 건설은 변함없이 계속 추진될 것이라고 천명하고 규모를 103만톤으로 확정했다.

정부와 박태준 사장은 새 파트너 일본의 정재계 주요인사는 물론 철강 3사를 만나 일일이 설득에 들어갔다. 종횡무진 노력 끝에 제3차 한일각료회담에서 종합제철건설 협력 방침을 결정했고 일본 조사단이 방문해 한국의 종합제철소 건설을 인정했다.

철강산업에 목숨을 바치겠다는 사명감이 아니었다면, 종합제철소는 또 한 번 무산됐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숨 가쁜 물밑작업 끝에 1969년 8월 28일 한일 양국 정부가 종합제철사업 협력원칙에 합의했다.

이에 IBRD조사단도 다시 한국을 찾아와 일본의 협조 결정에 힘을 실어 주었다.

대일청구권 자금 전용을 통해 제철소 건설자금이 확보되자 본격 공사가 시작되었다. 박태준은 공사를 독려하면서 직원들에게 “이 제철소는 식민지배에 대한 보상금으로 받은 조상의 혈세로 짓는 것이니 만일 실패하면 바로 우향우해서 영일만 바다에 빠져 죽어야 한다는 각오로 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자금지원 타당성을 조사하기위해 포항에 온 일본민관조사단.
3. 다섯 번의 실패와 기적, 마침내 영일만에서 꽃피우다.

이처럼 철석같이 믿었던 KISA의 배신, 그리고 대일청구권자금을 통한 자금줄의 변경에 이어 한·일 기본협약에 따라 우리나라에 최초의 종합제철이 영일만에 들어서게 되었다.

대한민국 정부의 종합제철 건설시도는 모두 여섯 차례에 이른다.

첫 종합제철건설시도는 1958년 8월, 제1공화국정부에 의한 것으로, 강원도 양양을 입지로하는 조강연산 20만톤 규모였지만 구체적인 계획도 뒤따르지 않았고 국내외여건의 미성숙으로 좌절되었다. 이후 1961년 3월경, 제2공화국 정부가 또다시 종합제철건설을 계획했으나 실현하지 못했고, 5·16 이후에도 한국종합제철(주)까지 세워 서독 DKG 그룹을 통한 조강 연산37만톤 규모의 종합제철건설과 미국투자공동체를 통한 31만톤 규모의 종합제철건설을 추진하지만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정부는 종합제철건설이야말로 ‘경제자립의 礎石’임을 확신하고 어려운 여건에서 다시 종합제철건설을 시도해 제3공화국 정부는 KISA를 통한 조강연산 60만톤 규모의 종합제철건설을 시도해 포항종합제철(주)도 창립까지 시켰지만 막판 국제차관단의 배신으로 좌절됐다. 하지만 정부와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는 이에 굴하지 않고 어려운 여건에서도 자주적인 신사업계획을 수립하는 한편, 대일청구권자금전용을 통한 종합제철건설이라는 ‘기발한 방법’을 찾아내 기어이 성공시켰다.
포스코 창립식 1968 회사명패.
1968년 포항종합제철 창립식.
비록 다섯 번의 실패 끝에 거둔 성공이었지만 조강연산 103만톤 규모로 첫 발을 내딛게 됨으로써 전화위복의 효과를 거둬 당초 1974년 착공할 계획이었던 KISA안의 제2단계 확장규모를 한꺼번에 달성한 셈이 되었고, 국내외로부터 종합제철사업의 기술적·경제적 타당성도 인정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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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한웅 논픽선·탐사기록 작가

결국 종합제철사업이 거론되기 시작한 지 꼭 10년만인 1968년4월 1일, 39명의 창설요원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 명동 유네스코회관에서 조촐하게 열린 <포항종합제철주식회 창립식>에서 박태준 사장은 “온 국민의 기대와 희망 속에 출발하는 포항종합제철은 자립경제의 초석이므로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회사를 건설하자”는 취임사를 읽어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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