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실공사·외압 막아라"···책임·사명감으로 건설구매 사활

1968 효자주택단지 초기.
1968년 4월 1일 창립 이후 1970년 4월 1일 제철소 종합착공까지 2년의 시간은 포항제철의 미래 운명을 결정할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

1968년과 1969년은 부지와 기반시설 조성도 긴박했지만, 한편으로 본격가동에 대비한 제철소 설비와 안정적인 원료구매, 그리고 전국에서 몰려 올 근로자들이 안심하고 조업에 집중할 수 있는 숙소와 주택마련도 시급했다.
포항제철소 건설을 위한 방파제 축조 현장(1968)

특히 설비구매는 쏟아지는 각종 외압을 철저히 방어해야 부실시공을 막을 수 있었다. 또한 제철소 창업요원들이 안심하고 대한민국의 大役事에 매진하기 위해서는 ‘보금자리’를 만드는 일부터 서둘러야 했기 때문이다.

1968년 11월 12일 박정희대통령의 건설현장 첫 방문 롬멜하우스.
1) 대통령의 불시 첫 방문

제철소부지조성을 위해 한편에서는 불도저를 동원한 정지작업이 또 다른 곳에서는 공장부지 내 민가철거로 어수선하던 1968년 11월 12일 오전 9시.

포항제철소건설 지휘본부가 설치된 롬멜하우스에서 요란한 전화벨이 울렸다.

박종태 포항사무소장은 포항경찰서장으로부터 “잠시 후 10시쯤 박정희 대통령이 헬기로 건설사무소를 방문하는데, 이 방문은 비공식방문이므로 일체 극비로 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박 소장은 즉시 서울에 출장 중이던 박태준 사장에게 이 내용을 보고하고 건설사무소 앞 공터에 헬기가 착륙할 수 있도록 ‘H형 표지’를 급히 만들어 설치했다. 그러나 포항지역 해안의 강풍으로 대통령의 불시 방문시간은 오후로 연기되었고, 그 덕분에 박태준 사장은 군부대의 협조를 받아 간발의 차이로 대통령보다 먼저 롬멜하우스에 도착할 수 있었다.

대통령의 첫 방문은 순탄하지 않았다. 대통령이 현장 상공에 도착해 내려 보니 사막처럼 황량한 벌판이었다. 특히 모래 사장 위에 헬기가 내려앉으면서 일으킨 모래바람 때문에 대통령은 헬기에서 한참 동안 내리지 못하고 대기해야 했다.

모래바람이 잦아지자 박태준 사장은 헬기로 달려가 대통령을 롬멜하우스로 안내해 공사 진행현황을 브리핑했다. 예상치 못했던 악조건과 싸우는 제철소 건설요원들을 격려하러 왔지만 보고들 듣는 대통령의 표정은 밝지 못했다. 그리고 방문을 마치고 현장을 떠나며 혼잣말처럼 “이거 참, 남의 집 다 헐어놓고 과연 제철소가 되기는 되는 기야?”라고 중얼거렸다.

부지조성 공사가 한창인 제철소 모습.(1969)
대통령의 숨소리까지 듣고 있던 박태준 사장이 그 소리를 놓쳤을 리 없었다. 해방 이후 6번이나 추진했지만, 번번이 실패하다 마침내 추진하게 된 종합제철소, 건국 이후 가장 큰 프로젝트에 대한 불안한 대통령의 속마음을 알아 챈 박태준 사장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생전에 포항제철소를 13차례나 찾았던 박정희 대통령의 첫 방문은 그렇게 ‘한 치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모래바람 속에 다녀갔다.
초기 건설회의 모습.(1970)

2. 외압부터 막아라! 책임감과 사명감으로 사활을 건 설비구매

조강연산 103만 톤 규모의 1기 설비계획은 3단계에 걸쳐 추진되었다.

첫 단계는 KISA와의 기본협정에 따른 것으로 초기규모 조강연산 60만 톤, 최종확장 규모 조강 연산 300만 톤 이상을 전제로 한 설비계획이었다. 1968년 당시 국내 철강기술은 낙후성을 면치 못했다. 제선부문 설비로는 삼화제철소의 소형용광로 8기와 동국제강의 고로 1기가 있었고, 제강부문 설비로는 구식 평로 및 전기로가 있었다. 압연 부문 설비로는 철근을 뽑는 철근 압연기를 주축으로 한 소형제강압연기와 ‘풀오버타입’의 판재압연기 등 부분수동식설비가 고작이었다.

제선, 제강, 압연 등 일관생산공정을 갖춘 제철소도 물론 없어 포항제철은 제철소건설에 필요한 기술은 물론 건설 후 조업에 필요한 원료와 기술 및 노하우까지 모두 외국으로부터 용역형태로 도입해야만 했다.

1969년 12월 종합제철 건설자금조달을 위한 한일기본협약이 체결되자 제철소건설에 필요한 기자재구매교섭에 나섰다. 기자재를 구매해 본 경험이 없었지만, 건설자금이 제한된 상황인데 다 제철소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기자재를 저렴한 가격에 구매해야 했기에 가격 결정에 신중을 기했다.
원료구매 협상 당시 제시했던 제선공장 부지입간판 사진.

또 가격도 가격이지만 설비의 안정성과 첨단성도 중요했으나 제철소는 이에 대한 노하우도 전무했다. 설비구매에서 또 하나의 어려움은 제철소설비구매 자금의 부분이 일본자금이었기 때문에 기자재를 일본에서 도입해야 한다는 제약 조건이었다. 설비구매자금은 크게 청구권자금과 상업차관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청구권자금은 다시 유상자금과 무상자금, 상업차관은 현금차관과 자본재차관으로 구분되어 있었으나 당시 계약 내용상 현금차관은 전혀 없었다. 특히 청구권자금으로 구매하기로 되어있어 환차손 같은 문제 없이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던 제선공장 설비구매도 우리 측의 설비성능보장 조항 삽입주장과 운송조건 때문에 난항을 겪었다.

갓 세워진 회사로서는 경험과 기술부족이라는 내부문제와 복잡한 절차가 필요한 행정상의 불가피한 외부적 문제에도 불구하고 설비를 가장 효율적으로 구매하기 위해 설비구매팀을 구성해

이들은 일본으로 건너갔다.

비록 제철설비에 문외한이었지만 수백만 달러에서 수천만 달러에 이르는 고가설비를 구매한다는 책임감과 제철소 건설의 핵심업무를 담당하고 있다는 자부심으로 설비구매에 만전을 기하여 ‘특공대’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설비구매팀이 일본에서 동분서주하고 있을 무렵 회사는 설비 및 원료구매와 관련 심한 압력을 받고 있었다. 설비구매를 둘러싸고 여러 업체가 구매에 개입 위해 유언비어와 역정보를 퍼뜨렸고, 이에 따라 박태준 사장이 설비구매협상을 위해 일본에 가면 새로운 이야기가 나오고 귀국하면 또 다른 상황이 벌어지는 등 설비구매와 원료확보에 내외부에서 알력이 작용해 제철소 건설에 주력해야 할 영일만 사람들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당시 집권당인 공화당의 유력인사는 설비 구매 시 일정률의 리베이트를 내놓으라고 압력을 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요구에 응하면 포항제철소는 가동도 하기도 전에 부실해질 것은 자명한 일이다. 이에 박태준 사장은 청구권자금의 성격, 설비구매, 건설공사, 건설 후 조업 등 앞으로 전개될 모든 상황을 미리 점검해 보고 장고 끝에 중대 결심을 하게 된다. 이 문제를 해결할 사람은 박정희 대통령밖에 없었다.
1968년 직원숙소와 주택단지부터 챙기는 박태준사장.

3. ‘건설안전’ 위해 직원 보금자리부터 확보하라

1968년 5월 30일, 경북도가 공장 부지 매수업무를 마무리하자 직원들이 거주할 주택용지 확보가 현안으로 부상했다.

당시는 농어촌지역 인구가 도시로 급속히 이주할 때여서 도시주택난이 심각했고 특히 포항지역은 제철소 건립이 예고되면서 주택과 학교는 급증하는 인구를 감당해낼 상황이 아니었다.

건설 초기 직원들은 가족을 이사시키지 못한 채 시내여인숙에서 숙식하며 건설업무에 임했다. 이에 박태준 사장은 “주거가 안정되어야 직원들이 정상적인 업무를 할 수 있다”며 자가 주택제도의 시행을 결정하고 관계기관을 설득해 주택건립허가를 받아냈다.
▲ 이한웅 논픽션·탐사 기록 작가

그러나 이번에는 자금확보가 문제. 당시 포항제철소는 운전자금고갈로 주택단지 부지 매입은 고사하고 당장 직원 봉급을 줄 여력도 없었다. 그래서 박태준 사장은 명함 한 장만 들고 지금의 우리은행 전신인 한일은행 하진수 은행장을 찾아가 20억 원을 대출해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제철소에 대한 차관문제가 매듭짓지 않아 다른 은행들은 난색을 표했고 당시 경제규모로 봤을 때 한 은행이 감당하기에는 부담이 큰 금액이었지만 한일은행 측은 박태준 사장의 열정을 믿고 대출을 승인한다. 이 일을 계기로 한일은행은 포스코의 주거래은행이 되고 지금까지 우호 관계가 유지되고 있다.

주택단지 후보로 오른 곳은 포항 인근의 환호, 인덕, 해도, 오천, 효자 등지와 경주 안강이었는데 현장답사에 나선 박태준 사장은 회사와의 거리, 단지규모, 주거환경, 교통 편의성은 물론, 조성비용까지 감안, 야산이던 효자지구를 직원 주택단지로 결정했다.

설비구매에 대한 박태준사장의 건의서 왼쪽상단에 박정희대통령이 친필사인을 한 이 문서는 종이마패로 사용된다
박정희 대통령이 써 준 종이마패(馬牌)

1970년 2월 3일.

박태준 사장은 청와대의 호출을 받았다. 제철소공사 진척상황을 보고받기 위해서였다. 보고가 끝나자 박 사장은 “구매 절차에 문제가 있습니다.”라며 굳게 다물었던 입술을 열었다. 당시 포항제철의 설비구매 과정에서 공급업체에 상납과 리베이트를 받아내려는 정치인들의 간섭과 압력이 극심했고 이에 따른 대책을 구체적으로 보고했다. 대통령은 “지금 말한 내용을 여기다 간략히 적어봐”라며 메모지를 밀어줬다.

박 사장은 만년필을 들어 ‘전문-목표-실천방법’ 순으로 자세하게 메모했다. 핵심은 “포철이 일본기술협력단과 협의하여 공급업체를 결정한다”는 것.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간편 계약(수의 계약)을 하더라도 정부가 이를 보증해준다”는 조항도 넣었다. 대통령은 메모를 읽고는 왼쪽 위 모서리에 친필서명을 했다. “이제 어려울 때마다 번거롭게 나를 찾아오지 말고 이걸 보여 주면서 소신대로 밀고 나가게.”

박태준 사장을 비롯한 경영진이 외풍에 휘둘리지 않고 소신껏 일할 수 있도록 대통령이 배려한 것이다. 이날 이후 포철은 설비구매의 주체로 나설 수 있었고 그 메모지를 포스코 사람들은 ‘종이 마패’라고 불렀다. 이 <종이마패>는 지금도 포항 본사 옆 포스코 역사박물관에 진열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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