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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호순병원 원장

좋은 기억은 잘 잊어집니다. 좋은 기억을 잘 잊어버리는 대표적인 병이 바로 치매라는 병입니다. 마치 머릿속에 지우개가 들어 있는 것처럼 행복했던 기억, 좋았던 기억, 아름다웠던 기억들을 하나씩 지워 갑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이름이나 얼굴이나 그리운 친구들의 얼굴이나 모습들도, 어릴 적 뛰어놀고 즐거워하던 동내 길도, 심지어는 자기 자신 조차도 자꾸 잊혀가는 병이 바로 치매입니다. 치매는 ‘정상적으로 생활을 해 오던 사람이 후천적인 다양한 원인에 의해, 기억력을 비롯한 여러 가지 인지 기능의 장애가 나타나 일상생활을 혼자 하기 어려울 정도로 심한 영향을 받는 상태’라고 정의합니다. 치매는 정상적인 생활을 해 오던 많은 인지 기능들 중에 특히 기억력의 장애가 먼저 나타나게 되는 병입니다. 그런데 이 잊혀 가는 기억들은 소중하고 귀하고 중요한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잊히면 안 되는 기억들이지요.

치매를 일으키는 병들은 매우 많습니다. 대표적인 병이 바로 ‘알츠하이머병’입니다. 독일의 정신과 의사인 알츠하이머 박사가 1907년 자기의 이름을 자랑스럽게 붙여서 연구 발표해 낸 병이 바로 이 병입니다. 이 알츠하이머병의 특징이 바로 기억력의 장애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 원인으로서는 노화를 제일 먼저 꼽으며 현재 치매를 일으키는 병들 중 약 70% 정도가 이 병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치매’라고 하면 ‘기억력 장애’라고 자동적으로 생각하게 하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치매의 증상은 기억력의 장애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기억력의 장애가 제일 대표적인 증상입니다. 결국 잊히면 안 될 기억들을 잊어 가는 병이 바로 치매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반면에, 나쁜 기억들은 쉽게 잊히지 않고 오히려 더 새록새록 떠오르기도 합니다. 나쁜 기억을 잘 잊어버리지 못하는 대표적인 병이 바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라는 병입니다. 마치 머릿속에 조각칼이 들어 있는 것처럼 잊힐 만하면 다시 기억으로 새겨 내고 잊어버리고 싶어도 다시 각인시켜 줍니다. 전쟁 때 전우가 죽고 다치고 적이 죽고 그 아비규환 속에 몸부림치며 겪었던 고통스러운 순간들을 원치 않아도 다시 기억나게 해 줍니다. 혹은 지진이나 홍수나 큰 화재 같은 천재지변을 겪은 후 몸서리 처지는 자연의 재해 속에 살아남은 기억들, 성폭행, 테러를 겪은 후, 큰 교통사고나 폭력, 학대, 혹은 강간 같은 끔찍한 경험들은 잊어버리고 싶어도 잘 잊히지 않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이 병의 특징은 그런 트라우마 후에 나타나는 반복적이면서 원치 않는 고통스러운 기억의 회상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끔찍한 상황을 ‘편도체’라고 하는 뇌의 부위가 정서적으로 너무 강력하게 반응하여 기억을 담당하는 ‘해마’라고 하는 곳에 깊숙이 저장해 버리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이 병으로 괴로워하는 사람들은 그 기억을 꿈으로 회상하여 악몽을 꾸기도 하거나 그와 관련된 작은 단서에도 곧바로 그 고통스러운 기억 속으로 빠져들게 하기도 합니다. 그 기억을 잊고 싶어도 마치 늪 속에 빠진 것처럼 그 기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하여 수면 장애가 오기도 하고 과도한 각성 상태가 되기도 하며 때로는 술이나 약물 같은 물질에 탐닉하다 중독이 되기도 합니다. 결국 심해지면 잊히지 않는 나쁜 기억으로 스스로를 망쳐버리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 할 수도 있는 병이 바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입니다.

기억을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만큼 망각도 중요 합니다. 좋은 기억은 오랫동안 잘 간직하고 나쁜 기억은 쉽게 잘 잊어버릴 수 있다면 정신건강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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