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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요즘 젊은것들이 버릇이 없다’는 것은 동서고금의 진리입니다. 수천 년 전의 비석에도 그렇게 새겨져 있답니다. 그러니 버릇없기로 치자면 너나 할 것 없습니다. 피차일반입니다. 늙은 자들도 젊어서는 다 버릇없이 살았습니다. 결국은 노소(老少) 간의 세대불화일 뿐입니다. 어쨌든 저도 노인이 되고 나니 버릇없는 젊은이들을 자주 보게 됩니다. 섭섭할 때도 있고 화가 날 때도 있습니다. 건강에 나쁠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생각을 아예 바꾸기로 했습니다. 예의를 모르는 젊은이를 만나면 ‘젊은것들은 어쩔 수 없이 미숙하다’라고 여기고 맙니다. 그리고는 두 번 다시 그쪽으로 눈길도 주지 않습니다. 귀도 막아 버립니다. 아예 보고 듣지를 않으면서 속으로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반드시 함무라비가 대신 복수를 해줄 것이라고 믿습니다. 두고 보자고, 언젠가는 반드시 뜨거운 맛을 볼 거라고, 지금은 아니지만 늙어서는 꼭 보복을 당할 것이라고, 속으로만 웅얼거립니다. 그렇게라도 해야 조금이라도 마음이 편해집니다.

윤리지능(ethical intelligence)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말(言語) 산업이 발달한 미국에서 생긴 말입니다. 지능지수(IQ)와 감성지수(EQ)는 기본이고, 이젠 윤리지능 시대가 왔다는 것입니다. 감성지능은 상대방의 감정 상태를 이해할 수 있게는 해주지만 스스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는 알려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서로 상처받지 않고 사는 ‘슬기로운 생활’을 딱히 보장해 주지 못합니다. 당연히 윤리지능이 높아야만 사회생활을 훨씬 더 잘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슬기로운 생활’의 필수 조건이 되는 윤리지능의 다섯 가지 강령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남에게 해 끼치지 마라. 2. 상황을 개선하라. 3. 다른 사람을 존중하라. 4. 공정하라. 5. 사랑하라.

사실, 윤리지능 5대 강령의 대전제는 역지사지(易地思之)입니다. 경우나 입장을 바꾸어서 생각하는 좋은 버릇을 키우면 대부분의 사회적 불화는 피할 수 있습니다. 그것 말고 ‘슬기로운 생활’에 필수적인 게 또 하나 있긴 합니다. 어떤 일에서든 사람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행동에 초점을 맞추어서 생각하는 게 중요합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누구는 “죄도 사람이 저지르는 것인데 사람을 빼라니 말이 되느냐?”라고 반발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변하지 않습니다. “요즘 젊은 것들은 예의를 모른다”라는 말이 수 천 년 동안 위세를 떨치고 있는 것을 보면 압니다. ‘개구리, 올챙이 적 모른다’라는 속담이 그 함의와 별개로 인간의 본성을 잘 포착한 말이라는 걸 부정할 수도 없고요. 문제는 사람이 아니라 행동입니다.

제가 다니는 직장에 엘리베이터가 새로 많이 생겼습니다. 종전에는 5층까지는 계단으로 걸어 올랐습니다만 요즘에는 층수 불문하고 엘리베이터를 이용합니다. 장애인 배려 차원에서 국가적 사업으로 예산이 지원된 것이라고 합니다만 실제로는 사지 멀쩡한 사람들이 주로 사용합니다. 사정이 그런지라 늙어서 계단 오르기가 무서운 제 처지에서는 엘리베이터를 탈 때마다 고마운 마음,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그런데 젊은 사람들은 그렇지가 않은 것 같습니다. 남의 것을 빌려 쓰는 입장이면 좀 겸손할 필요도 있지 않겠나 싶은데 하나같이 안하무인입니다. 눈치 안 보고 엘리베이터 안에서 주전부리를 하는 것도 예사고 남에게 실례가 되든 말든 큰 목소리로 떠드는 것도 다반사입니다. 타고 내리는 순서에 장유유서(長幼有序)도 없습니다. 명색이 대학생들인데 윤리지능이 땅바닥에 떨어져 있습니다. “요즘 젊은것들은 예의를 모른다”라는 말이 절로 터져 나옵니다. 이 역시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늙은 자들의 자업자득입니다. 눈 딱 감고 “젊어서 미숙하다”라고만 여길 뿐입니다. 복수는 함무라비에게 맡기고요.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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