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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살면서 가장 부족했던 게 무엇이었던가를 생각해 봅니다. 어려서는 유복한 가정의 자녀들이 가장 부러웠고 젊어서는 돈과 명예가 탐이 많이 났습니다. 좀 더 나이 들어서는 학문이나 조직관계 속에서 권력을 추종하기 바빴습니다. 조금이라도 남보다 높은 위치에 서 보고 싶었습니다. 생각해 보니, 그때그때의 욕망이 언제나 제게 부족했던 것들이었습니다. 물론, 그 결핍감을 채워 넣으려는 의지가 세속적인 발전의 원동력이 되기도 했었습니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습니다. 아직도 세속적인 부귀영화가 좋아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것을 향해 아등바등 매달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습니다. 그저 조용히 안분지족(安分知足)을 누리고 싶을 뿐입니다. 인간의 욕망은 그 나이에 따라서 변하기 마련입니다. 살아가면서 자기의 실체를 분명히 깨닫고 자신의 본분과 역할을 똑바로 알면서 사람은 변해 갑니다. 괄목상대(刮目相對)가 학문의 경지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됨의 수준에도 그런 ‘놀랄만한 변화’는 항상 존재합니다. 어려서 미욱했던 자가 젊어서 총명해지고, 더 나이 들어서는 현명해지더니 말년에 들어서는 세상의 큰 스승이 되는 것을 우리는 자주 봅니다. 역사적 인물로 남아서 지금도 우리를 가르치고 있는 위인들을 살펴보면 십중팔구는 다 그런 인물들입니다.

서론이 길어졌습니다. 그동안 살면서 제게 가장 부족했던 것은 ‘윤리와 의리’가 아닌가 싶습니다. 세속의 이해관계에 매여 늘 그 두 가지에 소홀했습니다. 좀 더 일찍 그것들을 알았더라면 지금의 제 삶이 한층 더 원숙 원만해졌을 거라고 여깁니다. 생각할수록 후회막급입니다. 옛날이야기 하나를 들어서 그런 제 소회를 대신할까 합니다.

노(魯)나라 애공(哀公)이 애태타(외형이 흉했지만 모든 이의 사랑을 받음)를 들어 덕(德)에 관해 묻자 중니(仲尼)가 답했다. “저는 언젠가 초나라에 사자로 간 적이 있는데, 그때 돼지 새끼가 죽은 어미젖을 빨고 있는 광경을 봤습니다. 얼마 후 돼지 새끼는 놀란 표정으로 모두 죽은 어미를 버리고 달아났습니다. 어미 돼지가 자기들을 돌보지 않고, 자기들과는 전혀 다른 꼴이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어미를 사랑한다 함은 외형이 아니고, 그 외형을 움직이는 것을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싸우다 죽은 자는 그 장례식에서 장식 달린 관을 쓰지 않고, 발이 잘린 자의 신발은 소중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모두 그 근본이 없기 때문입니다. 천자의 후궁이 된 자는 귀밑머리를 깎거나 귀에 구멍을 뚫거나 하지 않습니다. 새 장가든 자는 집에서 쉬게 하고 관(官)의 일을 시키지 않습니다. 외형을 온전히 하는 것만으로도 그처럼 될 수 있는데, 하물며 온전한 덕을 갖춘 사람이야 더욱 그럴 것입니다.” ‘‘장자’ 내편, ‘덕충부(德充符)’’

‘재(才)’는 하늘에서 준 것이고 ‘덕(德)’은 스스로 이룬 것이라고 장자는 말합니다. 온전한 덕을 갖춘 자는 외형에 구애받지 않고 사랑받는다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예화가 등장하지만 결국은 겉으로 드러난 것에 집착하지 말고 ‘안에 든 것’에 치중하라는 교훈을 담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주제와 관계없이 ‘윤리와 의리’를 떠올립니다. 살아온 날의 반성을 겸해서입니다. 돼지 새끼들이 죽은 모체를 버리고 선뜻 떠난 것은 ‘윤리’가 사라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죽은 어미의 몸에서 쉽게 떠나지 못하는 새끼들도 많습니다. 그들 어린 생명이 지키고 있는 것은 ‘의리’일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그들 역시 어미의 썩어지는 형체에 연연해서가 아니라 잊을 수 없는 ‘근본’을 쉬이 잊지 못해서 떠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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