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물 흐르는 골목에 엎드리면 네가 사는 지붕까지
기어갈 수 있어 빗속에 숨은 발꿈치를 들을 수 있어
네 몸의 장마 냄새를 맡을 수 있어 소리에서 냄새로,
냄새에서 예감으로, 예감에서 육체로 부글거리는, 오래
참은 말들이 이룬 한낮의 폭우


식물은 빗속에서 동물이 된다. 눈으로, 귀로, 셔츠와
속옷으로 흘러드는 비를 마시며, 움직일 수 없는 몸으로
움직이는 뿌리의 수평, 꽃을 잃고 색을 잃은 진딧물들이
소름 돋는데, 몸을 둥글게 꺾으면 뱀과 넝쿨 중 어느
쪽이 더 슬플까.


둥근 등뼈와 어깨의 비대칭, 작고 예쁜 젖가슴…… 우
리가 뒤엉켰다가 풀어진 자리에 곡선의 시절을 기억하지
못하는 비가 수직으로 내리꽂힌다.


얇은 살갗 하나 뚫지 못하면서 너는, 식물의 심장까지
어떻게 바늘을 밀어 넣는 거니


비가 아파서 우산을 펴는 사람이 있다.




(감상) 비를 좋아하는 식물이 곧 ‘나’라고 생각해 보자. 그러면 나의 심장까지 바늘을 밀어 넣는 비가 사랑하는 사람의 체취라는 상상이 든다. 장마철에 너를 소리에서 냄새로, 냄새에서 예감으로, 예감에서 육체로 느끼려는 내가 보인다. 하지만 곡선의 추억을 기억하지 못하는 너는 육체적 사랑마저 한낮의 폭우로 여기고 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비가 아파서 우산을 펴는 사람’이므로, 그 사람이 아플까봐 더 걱정하는 너무나 순진한 이가 아닌지. (시인 손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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