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도저' 박태준+열정의 요원들, 우여곡절 딛고 두 번째 도전 성공

직원들의 자전거 출퇴근 모습.
1기 종합준공의 감격도 잠시, 포항종합제철은 제철소 설비를 점차 확장시켜가면서 조업도 해야 하는 ‘일면 건설, 일면 조업’의 환경에서 제3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최우선사업’ 인 포항제철소 2기 프로젝트를 추진해야 했다.

1974년 6월 29일 제철소 주물선공장공사현장을 찾은 박 대통령부부. 한달여 후 육영수여사는 문세광의 총탄으로 숨졌다.
1)포항제철소 2기의 착공과 준공

대한민국은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기간인 1967년부터 1971년 까지 화학·철강·기계공업 등 공업생산에 역점을 두고 정책을 진행한 결과 연평균 9.6%라는 고도성장을 달성했다. 그 결과 국내 철강재 수요도 급증했다. 1972년 연간 조강수요는 252만 톤이었으나, 계속 증가해 1976년에는 489만톤, 1981년에는 1,355만톤에 이를 것으로 전망되었다.

이 같은 국내 철강수요 증가추세가 제철소증설의 필요성을 대두시켰다. 따라서 정부는 제철소 2기 설비의 건설을 서둘렀고 포항종합제철은 이미 1971년 2월 정부로부터 2기 설비 건설사업을 제3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최우선사업’으로 지정받아 놓고 있었다.
한창 진행중인 2고로 설치 공사를 배경으로 형산강에서는 전국조정대회가 열렸다.
포항제철은 2기 건설 시 설비 대형화를 추진, 철강재 생산단가를 낮추고 국제경쟁력을 강화하는 한편, 고로 2기 체제를 갖춤으로써 안정조업 기반을 구축하려 했다.

출발은 순조로웠다. 1기 건설 중이던 1971년 10월 7일, 정부는 경제기획원·상공부·산업은행·KIST 그리고 포항제철의 직원들로 ‘제2기 설비계획심의위원회’를 구성했다. 이 위원회는 1972년 3월 16일 조강연산 260만 톤의 2기 사업 기본계획을 작성, 정부에 제출해 검토받았으며, IBRD로부터도 타당성을 인정받았다. 1972년 8월에는 당초 1974년 8월로 예정하던 착공 시기를 1973년 12월로 앞당김에 따라 각종 계획을 재조정하여 수정사업계획서를 작성했다.
2기건설을 위한 면적확보를 위해 형산강 유로변경을 시도했다
1973년 5월에는 사업계획의 근간이 되는 기본기술계획서(MER) 중간보고서를 접수했다. 공장배치계획에서 최종규모는 KISA 계획 당시 300만 톤이었는데, 1기 설비와 주물선공장 계획 시에는 500만톤으로, 2기 설비계획 시에는 700만톤으로 늘어났고, 2기 설비의 건설진행 중 다시 850만 톤 이상을 목표로 했다.
형산강 유로변경 공사.
이들 설비를 건설하기 위한 면적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냉천의 유로변경과 형산강 하구개발이 불가피했다. 1972년 2월 포항제철이 주물선 사업의 실수요자로 지명됨에 따라 그때까지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주물선공장의 신설에 따라 향후 4고로 용지 확보가 어려울 것으로 판단돼 이를 해결하기 위해 2고로는 1고로에 최대한 근접해 배치했다.
2고로 착공을 위해 첫 삽을 뜨는 내빈.
그러나 순조롭던 2기 건설은 자금조달 루트에서 예상치 못한 난관을 만난다.

당초 1기 설비가 주로 일본의 설비로 건설된 만큼 설비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들여오기 위해 1972년 9월 제6차 한일각료회담에서 1억3500만 달러의 재정차관을 요청했다. 그러나 차관도입이 진행되던 중 1973년 8월 세칭 ‘김대중사건’이 발생하자 차관제공에 호의적이던 일본이 입장을 급선회하여 한일각료회담마저 연기했고 마침내 1972년 12월 제7차 한일각료회담에서 일본은 한국 측이 요청한 1억3500만달러 중 수출입은행차관 4500만 달러는 제공하고 정부차관은 유보했다.

일본으로부터의 차관도입이 어려워지자 박태준 사장은 급히 유럽으로 날아갔다.

유럽의 설비공급사들을 활용, 양동작전을 펼친 것. 서독 오토(Otto)의 미들만 사장에게는 포항에서의 협상에 대비해 모든 준비를 마친 후 포항으로 와 달라는 내용의 서한을 전달했다. 이처럼 박태준 사장의 구미지역 차관교섭이 활발하게 진행되자 일본 측은 당황했다. 일본설비제작업계는 특사를 박태준 사장에게 보내 약 8000만 달러 규모의 설비공급을 희망하며, 2기 설비공급에 참여할 수 있기를 바란다는 의사를 밝혔다.

2고로의 본체 공사 장면.
결국 포철은 1기 설비와 기술적 관련성이 많은 제선·제강·열연·분괴·동력계통 등은 일본의 상업차관자금으로 구입하고 소결·석회소 연속주조설비는 오스트리아 푀스트로부터 코크스ㆍ화성설비는 서독의 오토로부터 들여오기로 하고 모든 설비에 대한 건설공급계약을 체결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2기 건설 도중 1974년 8월 15일 문세광의 박정희 대통령 저격 시도사건이 일어나자 국내 정치정세가 불안해졌고 그때까지 낙관적이던 차관교섭도 한때 큰 난항을 겪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포항제철은 1기 종합준공 5개월만인 1973년 12월 1일, 연산 260만 톤 확장을 위한 2기 설비공사에 들어간다. 2기 설비의 준공목표는 1976년 6월 30일. 당초 포철은 1기 설비조업이 정상궤도에 오른 후 일정 수준의 조업경험을 토대로 1974년 말 착공하여 1978년 초 준공할 계획이었으나 조기 건설의 필요성에 따라 기본공정계획을 수정한 것이다.

38설비공사 마무리때는 정리정돈 별동대가 투입됐다
2) 일면조업, 일면건설 조업과 병행한 건설공사.

2기 설비 건설공사는 원료처리지역 일부를 제외한 부분의 공장 부지가 이미 조성되어 있었고, 1기의 경험과 교훈을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유리한 조건이었지만 조업과 건설을 병행해야 한다는 점과 기존공장설비에 연결해 시공해야 한다는 점이 큰 어려움이었다. 또한 일본, 미국, 오스트리아, 서독, 프랑스의 5개국 10개사로부터 다양한 설비가 도입됨에 따라 이에 대한 종합관리도 쉽지 않았다.

이에 다양한 설비의 성능을 보장받기 위해 세계적인 6개 검정용역회사와 계약을 체결하여 검정을 강화했고, 소결공장의 설비도면완성이 지연되고 기자재공급도 늦어지자 공기준수를 위해 한겨울에도 돌관공사에 돌입했다.

준공을 6개월 앞둔 1975년 마무리공사 때부터 ‘주요공사주간목표관리기법’을 도입, 주간점검체제를 확립하고, 공사 진도가 다소 부진하던 1976년 3월 초에는‘공사독찰부장제도’라는 1일 사장제를 활용해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이 같은 공사관리에 힘입어 D-47일인 1976년 4월 17일 열풍로를 건조하고, 5월 16일에는 고로건조를 시작하여 5월 31일, 2기를 종합 준공함으로써 당초 예정보다 공기를 30일 단축했다.
2고로에 화입(火入)하는 박정희 대통령과 박태준사장.
이로써 포항제철은 1기의 103만 톤에 157만톤을 더하여 260만 톤 규모를 달성하고, 2개의 고로를 가동함으로써 안정조업체제도 구축했다. 2기 설비투자비는 내자 966억원, 외자 1,688억원(3억4,800만 달러), 합계 2,654억원이 소요되었다. 소요내자 중 91%에 해당하는 879억6,700만원은 1기 조업을 통해 실현한 이익과 기타유보자금으로 자체 조달했다는 것이 큰 의미가 있었다.
1억불 수출의 탑(1975.11.29).
한편 종합준공식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2기 설비는 거의 대부분 국내기술진에 의해 이뤄졌다고 치하했다.



3) 또 하나의 제철소, ‘주물선 공장’

1960년 초까지 국내 주물공업은 재래식농기구제조 등에 머문 매우 낙후한 분야였으나 1, 2차 경제개발 5개년을 거치며 주물생산 수요가 급증해 수요량의 상당 부분을 수입해야 했다. 이에 정부는 1970년 8월에는 강원산업을 실수요자로 내정·주물선공장 건설을 추진했으나 1971년 강원산업은 공장입지가 부적당하고 투자비가 과다하며 경제성이 없다는 이유로 건설에 난색을 표했다. 이에 포항제철은 적자가 예상됐지만 국내 기계공업에 필수적인 주물선을 안전공급하기 위해 1972년 2월 실수요자지정을 받아 연산 15만톤 규모의 주물선 공장건설에 들어간다.

1972년 4월 15일 주물선건설추진반이 발족 되었다. 주물선은 당시 국가 5대 중공업 사업의 하나였다. 비록 연산 15만톤의 작은 규모로 출발했으나 거기에는 하나의 단위 제철소라고 할 만큼 수많은 설비가 집약되어 있었다.

주물선공장은 당시 ‘개밥에 도토리’ 또는 ‘미운 오리새끼’였다. 1기 설비와 2기 설비 건설 중간에 끼여 적지 않은 괄시를 받았고, 상당한 불이익도 당했다. 북쪽 끝 한 모퉁이 콘세트 막사에 사무실을 차리고 모래바람과 싸워야 했으니 그 형편이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그래서 당시의 요원들은 그 시절을 빗대어 자조 섞인 말로 ‘북간도 시절’이라고 불렀다.
형산강둑에서 포철공장 건설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노인들.
1972년 12월 24일 착공한 주물선공장의 당초 예정준공일은 1974년 12월 10일. 그러다가 기자재 선적을 1개월, 현장공사를 40일 앞당겨 10월 1일 화입을 목표로 공사를 진행했다. 그러나 이때 석유파동의 여파로 기자재 입하가 지연되고 한 달 이상 지속된 장마로 인하여 당초 공기를 달성하는 것조차 어려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이에 건설요원들은 10월 1일까지 화입하지 못할 경우 모두 물러나겠다는 각오로 일괄사표를 제출하고 비상근무에 돌입, 모든 수단을 강구하고 불철주야 돌관작업을 강행, 9월 30일 예정대로 건설을 종료하고 10월 1일 화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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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한웅 작가·콘텐츠연구소 상상 대표

△국내 최초의 민간철도- 포스코 통근열차

국내 최초의 통근열차 개통식.
국내 최초의 사철(私鐵), 포스코 통근열차. 사철은 흔치 않은 발상이었다. 지금까지도 우리나라는 모든 철도가 국유화되어 있어, 사철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제철소 2기 공사가 한창 추진되던 1975년 7월 1일, 포스코 첫 통근열차가 힘차게 레일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구간은 포항역에서 제철역까지 10.8km. 이때부터 철로가 직원들의 교통수단이 된 것이다. 이 구간을 처음 시운전했던 기관사 김월출 씨는 통근열차를 움직인 최초의 기관사였다. 그는 40만km 무사고 운전의 베테랑 기관사로, 선로밥을 처음 먹은 것은 1952년 6·25전쟁 때였다. 당시 직책은 증기기관차 화부. 그는 통근열차가 개통된 후로 십 수 년 동안 포스코인의 무쇠 발이 되어 주었다. 한편 원료수송을 위한 포스코 구내철도는 1968년 4월 착공, 1971년 4월 운행을 개시했다. 당시 구간의 총 길이는 18.8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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