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변질되는 동안에도 이름은 그대로이다.
시체가 되어 썩은 국물을 흘리는 동안
몸이 이름에서 격리되는 동안
두껍게 밀폐된 어둠이 죽음을 덮어 가리는 동안
이름은 허리를 굽히고 말을 붙이며 / 조문객들을 맞았다.
죽지 않은 이름과 악수한 몇몇 조문객은
눈으로 영정을 만지며 글썽거렸다.
이름에서 주름이 생기도록 울먹였다.
차갑게 굳은 살 안에서 썩은 수프가 걸쭉해지는 동안
이름이 얼마나 자상하고 따뜻했는지
안타까워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이름이 쓴 게 정말로 시가 맞느냐고
숙제검사를 하는 것도 아닌데
30년 동안 어쩌면 그렇게 똑같은 얘기를
지치지도 않고 쓸 수 있냐고
취한 입으로 침 튀기며 비아냥거리는 이도 있었다.
<하략>
(감상) 죽음 이후에는 몸과 이름이 분리되지만 부끄럽게 살지 않은 이름은 좋을 수밖에 없습니다. 육체가 사라진 이후를 생각한다면, 지금 자신의 이름값은 하고 있는지 자문(自問)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시인은 그 이름마저 허무하지 않으려면 살아생전에 몸으로 자상하고 따뜻하게 행동했는지 성찰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평생 지치지도 않고 시를 쓰면서 정작 몸으로 그 이름을 더럽히는 ‘역설(逆說)’이라니! 투명한 이름을 향해 몸으로 애쓰고 나아가기 싫으면 차라리 시를 쓰지 말자. (시인 손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