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딛는 걸음마다 진한 '역사의 향기' 문화·힐링·자연 어우러진 야외박물관

지산동 고분군과 여성 탐방객.
경북 고령군은 대구와 경북 성주군, 경남 합천군, 창녕군과 이웃이다. 고령 지역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건 지금부터 약 3만 년 전. 대가야국 도읍지였고 우리나라 최초의 토기와 철기, 가야금 문화를 찬란하게 꽃피웠던 곳이다. 정견모주와 이바가의 사이에 난 아들 둘이 대가야와 금관가야의 시조가 됐다고 건국신화에 전해진다. 서기 400년 금관가야 멸망 이후 대가야는 후기 가야 연맹을 이끈 맹주로 평가받는다. 전성기에는 여수, 순창, 무주까지 그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이처럼 고령의 대가야 유적들은 서민의 삶과 동떨어지지 않고 주민 곁에서 호흡했다. 대가야가 고구려, 백제, 신라와 함께 4국 체제를 형성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고령의 속살을 들여다보면 그 학설에 더욱 수긍이 간다. 고령은 가야금의 고장이기도 하다. 대가야 시절 악성(樂聖) 우륵은 이곳에서 최초로 가야금을 만들었다. 현재 이곳에선 가야금 체험과 연주를 쉽게 할 수 있다. 대장간에서 불린 쇠를 두드리는 소리가 협연하는 듯 들려온다.
주산 아래 지산동 고분군 모습.
1500여 년을 거슬러 대가야를 지배하며 살았던 무덤의 주인을 만나러 가는 길은 설레었다. 고령읍 동쪽에 자리 잡은 주산(主山 310m)은 그리 높지 않지만 읍내를 내려다보며 양팔로 감싸 안은 형세를 갖춘 산이다. 오늘 걷는 길은 고령시외버스터미널을 출발해 고령향교를 거쳐 주산성에 오른 뒤 지산동 고분군을 둘러보고 대가야박물관으로 내려와 대가야테마파크까지 약 4km 정도 걷는 거리다. 파란만장했던 대가야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있는 무덤과 길을 걸으며 그들의 오래된 역사가 살아있음을 짐작하는 꿈결 같은 시간을 함께 할 뿐이다. 산줄기 오솔길을 따라 한 걸음씩 옮겨 디딜 때마다 세월의 더께에 쌓여있던 대가야의 화려했던 문화가 조심스레 감춰진 속살을 내보여준다.
지산동 고분군과 계단.
고령시외버스터미널에서 내려 중앙네거리와 장터거리를 지나 고령공공도서관을 거쳐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커다란 느티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고령향교 입구다. 계단을 오르면 너른 터 왼쪽으로 향교가 있고 외삼문 넘어 명륜당과 대성전이 보인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아담하다. 조선시대에 지어진 건물로 두어 차례 이전을 거치면서 지금의 자리에 있게 됐다. 향교 옆에 ‘대가야국성지’라 쓰인 석조물이 있고 그 빈터 자리가 대가야국 왕궁터로 추정하고 있다. 향교 안에 사람들이 눈에 띄지만, 세월의 무게가 내려앉은 자리는 가을 햇살이 대신 차지하고 오랜 시간 잘 다져진 역사는 담담하고 의연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대가야를 호령한 도읍지였음을 실감하는 순간이다.
지산동 고분군과 계단.
고령읍내에 있는 사적 제165호 고아동벽화고분은 대가야가 신라에 멸망하기 수십 년 전인 6세기 초 축조된 대가야 왕릉으로 추정되며, 가야 유일의 벽화고분으로 알려져 있다. 500년 왕업을 이어왔지만 남은 것은 주인조차 알 수 없는 거대한 무덤들뿐이다. 이제 깊은 잠에서 조금씩 깨어나고 있지만 남겨진 사료 부족과 후세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내버려진 세월이 너무 길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처럼 고령에 남아있는 수백여 기의 고분 중에 도굴꾼의 손을 타지 않은 무덤 찾기가 힘들 정도라고 한다. 1963년 고아동벽화고분 발굴 때 아름다운 연꽃 그림이 발견됐지만 무덤 안 모습은 안내판에 붙어있는 사진과 그림 몇 장으로 대신하고 있다.

향교 뒤로넘어가면 오른쪽으로 고령학생체육관이 보인다. 삼거리에서 주산 순환길 이정표를 확인하고 주산산림욕장 입구까지 걷는다. 주산성이 있는 주산을 올라 지산동 고분군을 지나 대가야박물관까지 이어지는 길이다. 고령읍에 솟아있는 주산(主山)은 12개 테마 길이 있는데 1구간을 ‘왕릉 가는 길’이라 이름을 붙였다. 이 왕릉 가는 길을 생각 없이 서둘러 걷는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그 옛날 이 길을 거닐었던 대가야 사람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더디게 걸을수록 잊힌 역사를 또렷이 기억하며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산동 고분군이 자리 잡은 주산은 대가야의 진산이었다. 읍내 아래 왕궁이 있었고, 사적 제61호로 지정된 주산성이 외적의 침입에 대비해 왕궁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 정상에 있는 주산성 성곽 대부분은 유실돼 형태를 찾기 쉽지 않지만 성의 일부였던 돌무지들이 흘러내리듯 가까스로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대가야의 쓸쓸한 역사 흔적을 보는 듯 어수선했다. 안타까운 마음을 안고 지산동 고분군이 보이는 방향으로 발길을 옮긴다. 청금정 방향으로 가면 가파른 내리막을 내려갔다 이정표 있는 곳에서 왼쪽으로 가면 되고, 충혼탑으로 내려가면 처음 만나는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갔다 왼쪽으로 내려가면 가야지역 최고, 최대 고분군인 지산동 고분군을 만나게 된다.
지산동 고분군 모습.
대가야에 이처럼 강력한 정치세력이 존재했다는 걸 증명하는 게 바로 지산동 고분군이다. 이 고분군을 비롯해 함안 말이산 고분군, 김해 대성동 고분군은 2013년 12월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됐으며, 2015년 3월 문화재청의 세계유산 우선 등재 대상에 선정돼 2020년 본 등재를 목표로 하고 있다.

진산인 주산 남동쪽으로 뻗어 내린 능선 위에 지금까지 발견된 고분은 모두 704기이지만, 앞으로 얼마나 더 늘어날지 모른다는 지산동 고분군은 한반도 고대 역사를 우리에게 생생하게 전해주는 보물 중 보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대가야가 고대국가로 성장하기 시작하는 서기 400년께부터, 신라에 멸망하는 562년 사이에 조성됐다고 알려져 있다. 고분군 규모는 총 길이가 2.4㎞, 너비 100~200m에 달한다. 가야 지역 최대 규모다.

경주나 김해지역에서 익숙하게 보았던 평지나 산자락에 있는 고분이 산 정상 능선 따라 이어 자리한 고분은 산 아래와는 또 다른 세계다. 일제강점기에 무자비하게 이뤄진 도굴로 인해 남아 있는 유적이 많지 않지만 고분 발굴을 통해 순장(殉葬)을 했던 흔적을 찾을 수 있었고 금관, 금 장신구, 대가야 번성의 원천이었던 다양한 철기 유물 등이 출토됐다.

가까이 또는 멀리 쭉 이어진 고분들이 말을 걸듯 다정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고분 사이를 걷노라면 새삼 삶과 죽음이 맞닿아 있음을 깨닫게 된다. 아등바등 살고 있지만 결국 죽음으로 가는 한 걸음 한 걸음이 아니던가. 이 땅을 호령하던 왕들도 우주의 법칙을 거역하지 못해 땅 속에 묻혔고, 지금은 이름조차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대가야 사람들은 이승의 삶이 내세에 이어진다고 믿었다. 산 사람을 함께 묻었던 순장 관습도 이 때문이었다.
탐방객 모습.
그나마 대가야는 생매장을 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발굴 당시 두개골이 함몰된 흔적이 남아있고, 아이를 감싸 안은 어른의 유골이 누운 자세 그대로 발굴된 점으로 미뤄 매장 직전에 숨을 거두었음을 알 수 있었다고 했다. 숱한 죽임을 지켜봤을 이 길은 아무 말이 없다. 한낮에도 그늘만 이어지는 빼곡한 솔숲 사이로 나무만큼 많아 보이는 작은 봉분들이 솟아있다. 나무에 가린 채, 세월에 잊혀 진 채 숨어버린 봉분도 적잖이 많을 것이다.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지산리 44호 고분은 국내에서 최초로 확인된 순장무덤이다. 내부를 원래 모습 그대로 대가야왕릉전시관에 재현해 놓았다. 거대한 순장 무덤을 연이어 만난다. 굼실굼실하게 늘어선 고분은 한 굽이 너머까지 쭉 이어진다. 고령 읍내가 다 내려다 보인다.
지산리 44호 고분에서 본 건너편 고분군.
한 무리 젊은 사람들이 고분 사이로 난 길을 따라 내려가는 모습이 비장해 보인다. 고분 길을 거의 내려오면 조금 전 보았던 건너편 고분을 보기 위해 대가야 통문을 지나 계단을 올라서야 한다. 지나왔던 반대편 고분을 다시 본다. 무덤에 묻힌 죽은 자들이 조곤조곤 들려주는 이야기를 생각하며 잠시 생각에 잠긴다
대가야박물관
고분 길이 끝날쯤 봉문 모양으로 둥글게 지은 왕릉전시관에 들러 국내 최대 순장묘인 지산리 44호 고분 내부 모습을 고스란히 재현해 놓은 것을 구경하고 내려오면 대가야박물관이다. 이곳에는 대가야국을 중심으로 고령 지역의 역사, 문화 관련 유물들이 전시돼 있다. 항상 스쳐 지나가는 것이 시간이지만 오래된 유적들은 역사로 남아 과거의 흔적을 현재에 남기고 지나간 시간을 증명한다. 과거의 유물과 몇 세기를 건너 함께 했던 오늘을 기억하며 언제나 이곳을 다시 찾을 이유가 생겼으면 좋겠다. 언젠가는 마주쳐야 할 생과의 이별을 떠올리며 묘비명을 생각해본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는 걸 이 길에서 다시금 느낀다.
▲ 글·사진= 윤석홍 시인·도보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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