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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식 포항지역위원회 위원·시인
만산홍엽 이윽고 추풍낙엽. 미화원 아저씨 비질도 막바지에 접어든 즈음이다. 보도에 뒹구는 갈잎을 보면서 애잔한 심사에 젖는다. 세월이 저무는 아쉬움이랄까 혹은 옷깃에 스며드는 한기 때문일까. 하나의 자연법칙일 뿐임에도 그렇다.

흔히들 ‘낙엽’이라고 칭하는 현상은 식물의 겨울나기 본능에 다름 아니다. 날씨가 추워지면 나무는 잎에서 만든 탄수화물을 줄기로 이동시킨다. 그런 다음 통로를 막아서 스스로 이파리를 떨어뜨린다. 양분이 다시 그쪽으로 흐르는 길을 차단하고자 함이다. 이때 줄기로 가지 못하고 잎사귀에 남은 탄수화물은 붉은 색소인 ‘안토시아닌’으로 바뀌면서 빨간 단풍이 된다.

식물의 잎에는 광합성 작용을 수행하는 엽록소가 많다. 햇빛을 좋아하는 엽록소는 푸른 가시광선과 붉은 가시광선을 선호한다. 초록빛은 광합성에 사용치 않고 반사해 버린다. 그 빛이 시야에 들어와 식물은 초록색으로 보인다. 또한 잎에는 ‘카로티노이드’라는 노란 색소도 들었다. 기온이 떨어지면 엽록소가 파괴되고 대신 카로티노이드가 남아 황금색 은행잎처럼 노랗게 변한다.

누각과 정자를 일컫는 누정은 사람이 모여서 대화하고 휴식을 취하는 공간으로, 건물 자체보다는 입지가 중요하다. 번듯한 외관이 아니라 경탄이 나오는 풍광이 핵심인 것이다. 우리나라는 일찍부터 정자 문화가 발달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누정의 숫자가 885개나 될 정도다.

누정은 원림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원림은 일종의 정원이나 의미는 다르다. 유홍준 교수에 따르면, 정원은 도심의 주택에서 인위적 작업을 통해 동산의 분위기를 연출한 것이고, 원림은 교외에서 자연 상태를 조경으로 삼아 집칸을 배치한 형태.

보길도 부용동 원림은 담양의 소쇄원과 함께 한국의 대표적 원림으로 손꼽힌다. 보길도 하면 윤선도이고 윤선도 하면 세연정이다. 진도의 운림산방을 포함해 삼대 원림을 모두 가봤으나 최고는 부용동 원림이 아닌가 싶다. 계절적으로 고즈넉한 만추의 분위기 탓도 있었으리라.

정쟁에 휘말려 해남에 낙향한 고산은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의병을 조직해 강화도로 떠난다. 인조가 삼전도에서 항복했다는 소식을 접하곤 도중에 뱃머릴 돌린다. 그는 제주도로 향하다가 풍랑으로 기항한 보길도 절경에 반해 정착한다. 쉰 한 살 때였다. 원림을 가꾸고 시가를 쓰면서 여생을 보냈다.

보길도는 윤선도 유적지로 유명하다. 조선 시대 국문학 걸작이 탄생한 산실이기도 하다. 늦가을 갈변이 시작된 수초와 노송에 감싸인 세연정은 한 폭의 수묵화 같은 기품과 자태를 드러낸다.

한데 이상한 일이다. 고산의 자취를 쫓으면서도 어쩐지 감동이 맞닿지 않는다. 오우가 같은 서정적 작품을 쓴 은둔에 보길도 산천이 공허한 건 왜일까. 역사가는 눈에 보이는 현상뿐 아니라 이면의 그늘도 보아야 한다는 충고가 떠올라서다.

‘섬 여행’ 저자 김준은 말한다. ‘세연정 좌우로 기생이 춤을 추었다는 동대와 서대가 있다. 고산의 권력을 가늠할 만하다. 절해고도 산속의 선계 조성을 위해 인근 노화도 주민도 동원됐다고 전한다.’ 산중턱 화강암 위의 동천석실 정자는 도르래를 설치해 음식을 공수했다니 어안이 벙벙하다.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는 어부들 노 젓는 소리를 한자음으로 표시한 그의 어부사시사 후렴구. 민초들 고통도 담긴 듯해서 일견 애처로운 여음으로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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