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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모든 인생에는 ‘고립과 의심’이 있습니다. 때로는 과다(過多)하게, 때로는 스쳐 가듯, 그렇게 ‘고립과 의심’ 속에서 살아갑니다. 싫든 좋든 그것이 주는 불안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 우리네 인생입니다. 돌이켜 보면, 어려서부터 ‘고립’은 제게 익숙한 ‘생활의 태도’였습니다. 친구들과 어울려 지내는 것보다 혼자 쓸쓸히 지낼 때가 더 많았습니다. 혼자 있을 때는 공상을 하거나 책을 읽었습니다. 나이 들어서는 운동을 많이 했습니다. 산에 오르거나, 정해진 시간에 운동을 배우러 다녔습니다. 사람도 주로 운동을 통해서 만났습니다. 가정을 꾸리고 나서는 사회적 고립 상태를 줄곧 유지했던 것 같습니다. 사회단체 가입이나 문단 활동 같은 것들과는 담을 쌓고 살았습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자발적으로 고립 생활을 추구하는 것으로 여겨졌을 겁니다.

제 평생이 왜 그렇게 고립지향적으로 흘렀는지 그 까닭을 잘 모르겠습니다. 타고난 기질과 제게 주어진 생활환경 탓인 것은 분명합니다만 그것들이 결정적으로 어떤 분기점 같은 것을 만들어내는 시점을 특정하기가 어렵습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것이 저에게 편하고 낯익은 것이 되어 있었습니다. ‘의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스스로 ‘귀가 얇다’고 생각했습니다. 밖에서 안으로 무엇인가가 잘 들어오는 타입이라 여겼습니다. 충동에 약하고(결정이 빠르고), 동조를 잘하는(잘 속는) 캐릭터라 자평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런 성격이 제게로부터 사라졌습니다. 매사에 의심이 많아지고 남의 말에 쉽게 동조하지 못하고 필요 이상의 결정 장애도 자주 겪었습니다. ‘고립’과는 달리 ‘의심’은 비교적 역사가 짧습니다. 그것이 저의 주된 ‘태도나 정조’로 자리 잡게 된 것은 그리 멀지 않은 일입니다. 아무리 멀리 가도 중년기 이후의 일인 것 같습니다. 그것이 어떤 경로로 제게 스며들었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오리무중일 것 같습니다. 다만 일말의 참고는 책에서 찾을 수 있겠습니다.

.... 뉴턴의 고립과 의심은 감각에 대한 신뢰 부족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었다. 이는 조현병 환자를 다루는 정신과 의사들에게는 익숙한 특징이다. 조현병 환자들은 보통 신체적 경험과 ‘유리(遊離)되어’ 있기 때문이다. 뉴턴은 한 구절에서 이렇게 썼다. “사물의 본성은 우리 감각보다는 그것들 서로 간의 작용에서 더 확실하고 자연스럽게 추론된다.”<중략> 어니스트 존스는 프로이트 기념 강연인 ‘천재성’에서 프로이트 심리학의 한 가지 특징이 유별난 의심, 다시 말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다른 사람들의 결론을 묵인하지 않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이어서 프로이트가 어떤 부분에서는 뜻밖에 쉽게 잘 믿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데 그것은 때로 미신에 가까웠다고 말한다. 존스는 이렇게 한 사람 안에 서로 반대되는 성향이 결합되어 있는 게 천재의 특징이라 생각하고, 그 중 한 예로 뉴턴을 든다. ‘‘처칠의 검은 개, 카프카의 쥐’’

뉴턴이나 프로이트 같은 천재들에게만 한 사람 안에 서로 반대되는 성향이 결합되어 있는 것은 아닐 겁니다. 고립과 의심 속에서 나름 좀 살아보니 그런 생각이 듭니다. 물리학이든 심리학이든 모든 학문들은 원인 없는 결과를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나 인생에는 ‘원인 없는 결과’도 아주 많습니다. 다른 그 무엇의 결과가 아닌 채 스스로 원인이 되는 것도 많습니다. 돌이켜 보면, 천재도 아니고, ‘결과 아닌 원인’으로는 더더욱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제게도 설명보다는 묘사를 요구하는 ‘생생한 삶의 현장’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것이 행여 평생 저를 따라다닌 ‘고립과 의심’ 때문이 아니었는지, 그 자초지종은 잘 모르겠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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