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대전이 한창이던 1940년 4월 봄날이었다. 구 소련의 스몰렌스크 지방 카틴숲에서 수천 발의 총성이 울려 퍼졌다. 폴란드의 군 장교와 지식인 등 전쟁포로들은 차례차례 소련군의 총부리 앞에서 쓰러졌다. 이렇게 숨을 거둔 사람은 모두 2만2000여 명, 소련군의 ‘카틴숲 대학살’ 사건의 참극이었다.

1940년 소련 비밀경찰 총수 베리야는 ‘일급비밀’이라는 붉은 도장이 찍힌 편지를 공산당 서기장 스탈린에게 보냈다. “이들은 소비에트 연방에 대한 적개심이 가득한 자들로 풀려나는 즉시 다시 우리에게 대항하려 들 것이니 총살형 처분을 내려주시길 바랍니다.” 스탈린은 “폴란드가 두 번 다시 독립국으로 일어설 수 없도록 하라”며 처형을 승인했다. ‘카틴숲의 학살’은 오랜 식민지 국가로 외세에 시달려 온 폴란드의 비극적 상징이었다.

퀴리부인과 쇼팽의 조국 폴란드는 그 유명한 ‘후사르 기병’으로 한 때 중부유럽을 호령하던 강국이었다. 1683년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 전투는 폴란드 기병대의 용맹을 보여준 일전이었다. 오스만투르크 제국은 유럽에서 세력확장을 위해 10만 대군으로 빈을 포위했다. 두 달에 걸친 공방전 끝에 오스트리아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함락 위기에 빠졌다. 그 때 4만6000명의 폴란드기병대가 나타나 전쟁의 승패를 뒤집었다.

폴란드 기병 돌격대는 전광석화 같은 속도로 오스만군 진영의 중앙을 돌진, 오스만투르크군을 박살냈다. 이 전투에서 오스만투르크의 최 정예부대 ‘예니체리군단’이 산산조각 나 이후 오스만투르크 제국은 다시는 이 때의 군대 규모나 훈련 수준을 유지하지 못했다. 이처럼 강력한 군사력을 가졌던 폴란드가 주변국가들에게 분할돼 식민통치 시대를 겪으면서 약소국가로 전락한 것은 강병에 구멍이 났기 때문이다.

16세기 이후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등 주변국 세 나라엔 뛰어난 지도자들이 등장, 국방력이 약화된 폴란드는 이들의 좋은 먹잇감이 됐다. 폴란드 비극은 강병을 게을리하면 바로 멸망이라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국방백서에서 북한에 대한 주적 규정을 삭제하는 등 약화일로의 국방태세를 국민은 걱정한다. 북한은 핵 보유국으로 굳혀가는데 폴란드의 교훈을 상기해야 한다.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