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 소련 비밀경찰 총수 베리야는 ‘일급비밀’이라는 붉은 도장이 찍힌 편지를 공산당 서기장 스탈린에게 보냈다. “이들은 소비에트 연방에 대한 적개심이 가득한 자들로 풀려나는 즉시 다시 우리에게 대항하려 들 것이니 총살형 처분을 내려주시길 바랍니다.” 스탈린은 “폴란드가 두 번 다시 독립국으로 일어설 수 없도록 하라”며 처형을 승인했다. ‘카틴숲의 학살’은 오랜 식민지 국가로 외세에 시달려 온 폴란드의 비극적 상징이었다.
퀴리부인과 쇼팽의 조국 폴란드는 그 유명한 ‘후사르 기병’으로 한 때 중부유럽을 호령하던 강국이었다. 1683년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 전투는 폴란드 기병대의 용맹을 보여준 일전이었다. 오스만투르크 제국은 유럽에서 세력확장을 위해 10만 대군으로 빈을 포위했다. 두 달에 걸친 공방전 끝에 오스트리아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함락 위기에 빠졌다. 그 때 4만6000명의 폴란드기병대가 나타나 전쟁의 승패를 뒤집었다.
폴란드 기병 돌격대는 전광석화 같은 속도로 오스만군 진영의 중앙을 돌진, 오스만투르크군을 박살냈다. 이 전투에서 오스만투르크의 최 정예부대 ‘예니체리군단’이 산산조각 나 이후 오스만투르크 제국은 다시는 이 때의 군대 규모나 훈련 수준을 유지하지 못했다. 이처럼 강력한 군사력을 가졌던 폴란드가 주변국가들에게 분할돼 식민통치 시대를 겪으면서 약소국가로 전락한 것은 강병에 구멍이 났기 때문이다.
16세기 이후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등 주변국 세 나라엔 뛰어난 지도자들이 등장, 국방력이 약화된 폴란드는 이들의 좋은 먹잇감이 됐다. 폴란드 비극은 강병을 게을리하면 바로 멸망이라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국방백서에서 북한에 대한 주적 규정을 삭제하는 등 약화일로의 국방태세를 국민은 걱정한다. 북한은 핵 보유국으로 굳혀가는데 폴란드의 교훈을 상기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