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선규 대구교대 교수.jpg
▲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평생을 공부로 먹고살았습니다. 선생 경력이 도합 40년입니다. 그동안 이것저것 배우고 가르쳐 왔습니다만 무엇 하나 똑 부러지게 알고 가르쳤던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부끄러울 뿐입니다. 그저 어렴풋하게 아는 주제에 학생들 앞에서는 만고불변의 진리나 터득한 자처럼 떠든 적도 많았습니다. 심지어는 공부의 신이나 되는 것처럼 거만을 떨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아마 자득(自得)의 묘(妙)를 쥐꼬리만큼씩이나마 조금씩 깨쳐나가던 때였지 싶습니다. 누구나 공부에 정진하다 보면 당연히 겪는 일이었는데 남들보다 나은 무슨 재능이나 지닌 것처럼 천방지축, 오만방자하게 살았습니다. 공부가 부족해서 듣도 보도 못하던 새로운 개념이 나타나면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되려 무용지식(無用知識)으로 몰아 냉대한 적도 허다했습니다.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라는 말을 마치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렀습니다. 결과적으로 공부에 많이 소홀했습니다. ‘무지한 스승’의 길을 걸어오지 않았나 하는 후회와 반성이 뒤따릅니다.

제 경우와는 정반대로, 교육계에서는 ‘무지한 스승’이 그리 나쁜 말이 아닙니다. 일종의 역설적 표현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합니다. ‘무지한 스승’이라는 책 때문입니다. 이 책은 1818년 루뱅대학 불문학 담당 외국인 강사였던 조제프 자코토(Joseph Jacotot)의 지적 모험을 다루고 있는 책입니다. 자코토는 프랑스어를 모르는 학생들에게 불문학을 가르쳐야 했는데 그는 학생들의 언어인 네덜란드어를 할 줄 몰랐습니다. 그는 자신이 알지 못하는, 혹은 자신이 전달할 수 없는 어떤 것을 학생들에게 가르쳐야만 하는 역설적 상황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자코토는 프랑스어와 네덜란드어 번역이 함께 실려 있는 책 한 권을 학생들에게 던져 주고, 번역문의 도움을 얻어서 스스로 프랑스어 텍스트를 익히도록 주문했습니다. 그 실험의 결과는 아주 놀라웠습니다. 학생들은 얼마 가지 않아 자신들의 생각을 프랑스어로 표현할 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자코토는 이러한 경험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결론들을 이끌어 냅니다.

첫째, 스승의 역할은 지식을 전달하는 데 있지 않다. 앎은 전수 받는 것이 아니라 터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역설적이게도 스승의 덕목은 오히려 무지이다.

둘째, 모든 인간들은 지능에 있어서 평등하다. 교육이 가능하려면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 모두가 지능에 있어서 평등하다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셋째, 무엇을 터득하는 데에는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가지 방식 및 절차가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무지한 사람들의 방법은 ‘우연의 방법’이다. 결국 그것이 ‘보편적 가르침’의 방법이다.

넷째, 무엇을 알아가는 지적 과정 속에서 작용하는 지능들은 본성적으로 하나이고 보편적이다. 전체는 전체 안에 있다. 전체의 어떤 임의의 부분으로부터 출발해서, 그것에 대한 앎을 다른 부분과 연관시킴으로써 새로운 것에 대한 앎으로 나아갈 수 있다. ‘박기순, ‘지적 불평등? 부르디외, 당신이 틀렸어!’(교수신문, 512호)’

제가 의식적으로 처음 공부에 임했던 것은 중학교 2학년 때였습니다. 1학년 때는 무협소설만 읽었던 터라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공부는 해야겠고, 누가 가르쳐주지는 않고, 헌책방에서 ‘삼위일체’라는 영어책을 하나 사서 무턱대고 읽기 시작했습니다. 수학도 비슷한 방법으로 아무 책이나 붙들고 풀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망망대해를 일엽편주로 건너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런데 몇 달의 시간이 흐른 뒤 기적처럼 저도 ‘자코토의 학생’이 될 수 있었습니다. 개안(開眼)의 은사가 내렸던 것입니다. 그 뒤부터 지금까지 공부로 먹고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저는 어쩔 수 없이 스승은 무지해야 한다는 자코토의 신념을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