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엄을 읽었다

한 시절 매달린 경(經)의 끝이
잊으라, 였을 때
억울해 너에게 편지를 쓴다

삼년간 벗이었던 화정공원의 물푸레나무
그마저 옹두리 만들며 스스로 물러서니
구청직원은 곧 베어버리겠다 말한다 또
잊으라는 것이다
산 위에 오르면 장엄하던 눈 아래 세계도
골목길에 들어서 쉽게 잊혀지고
그게 모두 내 허물인 듯

사랑도 나무도 읽지 말고 담아야 할 것을
한 시절 바라보다
화엄을 잃었다





<감상> 화엄경의 끝은 잊으라는 말씀이다. 곧 집착을 버리는 것이 화엄의 가르침일 것이다. 하지만 우매한 중생은 집착하므로 잊지를 못한다. 억울해서 사랑하는 이에게 편지를 쓰고, 베어지는 나무를 보고 안타까워한다. 잊어버리지 못하는 것도, 펼쳐진 장엄한 풍경을 쉽게 잊어버리는 것도 결국 자신의 허물이고 아상(我相)이 아닌가. 아상을 떼어내면(걷어내면) 사랑도 나무도 읽지 않고 그냥 담아야 할 것임을 깨닫는다. 집착하면 대상을 읽게 되므로 그냥 담아서 비워야 할 것들을 한 시절 바라보자. 그러면 화엄을 잃는다. 곧 잊으라는 말조차 잃어버리는 경지에 이르고 만다. <시인 손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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