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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원 화인의원 원장
다음 주 앞으로 다가온 3·1만세운동의 날이 올해로 100주년을 맞는다. 한 세기를 지나온 만큼 그날을 기억하기 위한 다채로운 행사들이 곳곳에서 열릴 예정인 가운데 지역에서 발생한 100년 전의 역사적 사실과 배경에 대한 관심, 또한 그 어느 때 보다 고조되는 분위기다. 한 향토사학자가 지역 모 언론을 통해 기고한 글에 따르면 우리 지역에서의 만세운동은 경북에서 가장 빠른 1919년 3월 11일 포항 장날을 기해 일어났다고 한다. 이후 열흘 뒤엔 청하장터, 송라 대전리 두곡숲, 그리고 그해 4월엔 연일지역 일원과 기계, 죽장 등 전 지역으로 확산 되었다. 특히 포항장터(현재 중앙상가 부근으로 추정)에서의 만세시위는 당시 본정동으로 불리는 일본인 집단 거주지 내에서 일어났다는 점에서 우리 지역 선조들의 독립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간절했던가를 엿보게 한다.

일제 강점기 시절, 우리 포항지역은 일본 정부의 이주정책에 따라 일본인들이 대거 몰려들었다. 자료에 의하면 만세운동 당시 포항면의 전체 인구 중 일본인의 비중이 24.35%에 달할 정도였다. 특히, 1908년 가가와현 어업단 80여 척이 고등어떼를 따라오면서 일본인이 정착하기 시작한 구룡포의 경우, 1932년엔 그 숫자가 287가구 1,161명에 이르렀다고 전해진다. 이런 많은 일본인들은 어업을 비롯해 지역의 산업 전반에서 독점적 지위를 누리며 주인행세를 했다. 당연히 주민들의 저항이 뒤따를 수밖에 없었다. 장기지역에서 활동하던 의병단체인 장기의진은 일본 순사주재소는 물론 일본인이 경영하는 점포 등을 수시로 공격했는데 그중에는 도가와 야스브로가 경영하던 장기 모포리 점포도 있었다. 그는 구룡포항의 어업권을 독점하며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인물이었다. 일본인들이 그의 공덕(?)을 기리며 세운 송덕비가 지금도 구룡포공원에 자리 잡고 있다. 당시 구룡포항은 미곡수탈을 위한 군산항처럼 어업수탈을 위한 전진기지나 다름없었다.

포항시는 지난 2011년 구룡포에 현존하는 일본인 가옥과 점포들을 복원해 ‘구룡포 일본인 가옥거리’를 조성했다. 입구에 세워진 안내판에는 거리조성 목적이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들의 풍요했던 생활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상대적으로 일본에 의해 착취되었던 우리 경제와 생활문화를 기억하는 산 교육장으로 삼고자’ 한다고 적혀있다. 하지만 막상 골목 안으로 들어서면 그 어디에도 당시 우리 선조들의 삶이 어떠했는지, 경제와 생활문화가 어떻게 착취를 당했는지에 관한 역사자료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단지 일본식 건물만 골목을 따라 늘어 서 있을 뿐이다. 그 속에서 100년 전 우리 선조들의 삶이 얼마나 처절했을까 상상하는 것은 온전히 방문객의 몫이다. 하지만 전통복장 대여점에서 빌린 일본 의상인 기모노를 입은 젊은 방문객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골목을 누비는 분위기에선 그마저도 여의치가 않다. 한낱 일본식 체험 현장처럼 만들어 놓고선 무슨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삼겠다는 것인지 안타깝기 그지없다. 애초엔 ‘구룡포 근대문화역사거리’로 불리던 것이 언제부턴가 갑자기 ‘구룡포 일본인 가옥거리’로 바뀐 이유를 알 듯하다.

한편, 일본인 가옥에 마련된 근대역사관 역시, 이름값 못하기는 매한가지다. 마땅히 있어야 할 역사적 자료가 없는 건 차치하더라도 일본인들의 구룡포 정착을 옹호하는 근대역사관은 분명 문제가 있다. 건물내부 한편에 걸린 이주 당시 상황을 설명하는 현수막에는 ‘황금빛 엘도라도 구룡포는 가난한 일본인 어부에게 새 시대, 새 삶을 열어 주었다’라는 문구가 또렷이 적혀있다. 기가 찰 노릇이다. 일본인들의 ‘새 시대’는 우리에겐 핍박의 시대였고, 그들의 ‘새 삶’은 우리의 억압받는 삶이었다. 침략자에겐 구룡포가 엘도라도였는지는 몰라도 우리에겐 착취의 현장일 뿐이다. 그런데도 그런 문구를 버젓이 쓰는 걸 보면 과연, 역사교육을 위한 근대역사관인지, 아니면 당시 일본인 거주민을 위한 기념관인지 당최 분간이 되질 않는다. 역사의식은 없고 역사 현장이라는 허울만 붙들고 있으니, 지난 2008년과 2013년 두 차례에 걸쳐 건물에 대한 등록문화재 지정 신청이 모두 보류된 것은 너무도 당연해 보인다.

해방 후 도가와 야스브로의 송덕비에 시멘트를 끼얹고 일본인 이름이 새겨진 돌기둥을 거꾸로 엎어버렸던 당시 우리 지역 선조들이 지금의 ‘구룡포 일본인 가옥거리’를 본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 정말이지 부끄럽기 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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