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를 1천 번 읽었다는 송시열에게 한 제자가 물었다. “스승님은 정말 맹자를 1천 번 읽으셨습니까?” “내가 맹자를 천 번 읽었지만 앞의 두서너 편은 일생 동안 외웠으니 몇천 번 읽었는지 알 수 없네” 송시열의 대답처럼 조선시대 선비들은 맹자를 가장 추앙하고 흠모했다.

“생(生)도 내가 원하는 바이고 의(義)도 또한 내가 원하는 바이지만 이 두 가지를 겸하여 얻을 수 없다면 삶을 버리고 의를 취하겠다.” 맹자에게 가장 이상적인 것은 의와 생을 모두 지켜 의로운 삶을 사는 것이지만 의를 버리고 생을 구해야 하는 상황에선 차라리 삶을 버리겠다는 것이 맹자의 선택이다. 육체적 생사의 문제보다 더 큰 것이 의라고 생각했다. 맹자의 이러한 사상을 실천에 옮긴 사람들이 조선의 선비들이었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의를 위해서는 온갖 회유와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목숨을 버린 사육신의 전통이 선비들의 마음 속에 계승됐다. 그러한 전통은 선비들이 도끼를 메고 대궐 앞에서 상소를 올리는 ‘지부복궐소(持斧伏闕訴)’로 이어졌다. 만약 자신의 상소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그 도끼로 죽겠다는 결의를 나타냈다. “바라건대 이 도끼로 신에게 죽음을 내려주시면 조상의 큰 은혜일 것이며 지극히 애통하고 절박해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문장으로 끝나는 구한말 의병장 면암 최익현의 ‘지부복궐소’가 대표적인 사례다. 최익현은 “난적은 누구나 쳐야 하니 고금을 물어서 무엇하리”라는 창의시(倡義詩)를 짓고 의병을 일으켰다.

면암의 의기를 따라 많은 유생들이 의병에 투신하는 바람에 후학들을 가르칠 스승을 찾기가 어려울 지경이 됐다. “자로는 잴 수 없고, 저울로도 달 수 없는 가치가 있다. 그 가치로 인해 우리는 인간인 것이다. 물질도 있어야 하고 계산도 해야 하지만 삶의 존귀함도 있어야 한다. 인간의 존엄, 문화의 본질, 인간다운 여유도 거기에 있으니 말이다.” 소설 ‘토지’의 작가 박경리의 말이다. 집권당의 재판 불복이 도를 넘어도 나서는 판사가 보이지 않는다. 판사의 DNA에 선비정신이 메말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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