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한몸 던져 나라 어이 아니 건지리"…청하장터를 꽉 채운 함성
포항시 북구 송라면에서 태어나 1919년 3월 22일 동지들과 청하면 덕성 장터 3.1만세 운동을 주도한 이준석(1896.5.7~1955.6.20)지사의 묘비명(墓碑名)에는 그의 삶이 잘 함축돼 있다.
이 교수와 포항의 3·1운동사(이상준 저) 등에 따르면 이준석 지사의 부친이자 이 교수의 증조부인 이익호 선생은 일찍이 구한말 상경해 배재학당에서 수학 후 민영환 대감 휘하에서 궁내부 주사로 공직생활을 했다.
하지만 을사늑약 부당함을 호소하며 1905년 민 대감이 자결하자 그도 고향 송라면으로 낙향해 대전리교회·유계리교회·청하교회를 세웠고, 청하향교 장의와 청하면장도 역임하며 계몽활동을 펼쳐나갔다.
3·1운동이 일어나기 1년 전 이익호가 호열자(콜레라)로 추정되는 병으로 45세 이른 나이에 세상을 등지자, 그 뜻은 장남 이준석과 3남 이준업에게 계승된다.
이 교수는 “할아버지는 1919년 14명의 동지들과 함께 청하·송라 지역 만세운동을 주도하셨다”며 “직접 만든 대·소형 태극기를 들고 3월 22일 청하장터에서 수백 명의 군중과 함께 만세운동을 하던 중 긴급 출동한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돼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혹독한 옥고를 치렀다”고 했다.
이곳에서도 엿장수와 이발사를 가장해 지역 청년들에게 독립의식 고취활동을 계속 펼쳤다. 이준석은 이태원이라는 다른 이름도 사용했는데 일제 감시를 피하려는 의도로 추정된다.
이 지사의 이러한 공을 기리어 1983년 대통령 표창이 추서됐고, 1990년 다시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이 교수의 작은 할아버지인 이준석의 동생, 이준업의 일생은 더욱 처절하고 치열했다.
형을 도와 만세 운동을 한 혐의로 8개월 간 옥고를 치른 후 만주로 망명해 항일독립운동 단체 신민부에 참여해 독립운동을 계속하다 다시 체포, 혹독한 고문을 받고 여독으로 순절했다. 그의 아들 이희모도 만주에서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독립군에 입대해 일본군과 싸우다 장렬히 전사, 2대(代)에 걸쳐 불꽃처럼 독립운동에 투신했지만 안타깝게도 대가 끊기고 말았다고 했다.
이 교수는 이러한 할아버지와 동지들의 숭고한 정신을 후세에 영원히 기리고자 선조의 생가터를 기증, ‘ 대전 3.1 의거기념관’이 지난 2001년께 문을 열었다. 대전리 14인 의사의 유품과 판결문, 영정 등 후손들이 소중하게 간직해온 100여 점이 전시돼 있다. 이 지사가 사용하던 엿가위와 이발 도구들도 전시돼 있다.
이 지사 가문의 가훈은 경천애인(敬天愛人).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과 백성을 사랑하자’라는 뜻이다.
이 교수는 “할아버지의 숭고한 정신을 본받고 부족하지만 나라와 민족, 남에게 봉사를 하고 베풀기 위해서는 우리도 (능력을) 갖춰야 한다고 항상 가슴 깊이 생각하고 있다”고 담담하지만 강한 어조로 말했다. 이 교수의 아버지 이영모 씨는 머리는 뛰어났으나 선친이 독립운동 등으로 충분한 공부는 하지 못했지만, 전문직인 도청 기술직 공무원 일을 성실하게 매사 노력하며 최선을 다했다고 한다.
이러한 가풍은 이 지사의 손자·손녀 대에 와서 마침내 활짝 꽃을 피웠다. 첫딸 이인자(대구가톨릭대 약학대 학장 역임), 장남 이병찬 석좌교수, 차녀 이인숙(약사), 차남 이병훈(대구 기독병원 원장), 3녀 이인선 대구경북경제자유구역청장(전 경북도 경제부지사), 막내 이병용(자연과 환경 회장) 등 6남매 모두가 각고의 노력으로 각자 분야에서 일가를 이뤘다.
이병찬 교수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는 현재 선조들의 고귀한 정신을 계승하는 길은 ‘바르게 사는 것’이라 생각한다”며 “바르게 사는 것이란 거짓 없이 자신의 직분에서 최선을 다해 근면 성실하고 근검절약하며 이웃과 민족을 돕는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