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갖 고문에도 굽히지 않고 조선 독립의 정당성 주장한 기개

▲ 장 손자 장상규 씨. 현재 칠곡군 왜관읍에서 거주하면서 광복회 활동을 하고 있다.
‘1심 판결 후로 공소도 상소도 아니 할 심산이었으나 한편으로 곰곰이 생각해 본즉 하루라도 빨리 죽는 나의 신세는 안락하다 할 수 있으나 형제 처자 친척 등의 원한이 없도록 상고는 하였노라.’

‘비록 상고(2심)재판에 유기나 무죄가 될지언정 현재의 각오(사형)는 조금도 변함이 없는 것이니 조금도 낙담되지 아니한 즉’(1930년 4월 12일 현제 진환군에게). 장진홍 선생의 의거 후 일본 오사카의 동생 의환씨 집에 몸을 피신했다가 거사 후 1년 4개월 만에 최석원 등 조선인 형사들의 끈질긴 추적 끝에 체포돼 대구 형무소로 압송 후 1심 사형판결을 받고도 꿋꿋한 기개로 동생 진환씨에게 남긴 편지글이다.
창려 장진홍 의사 기념비.
‘만물은 일생일사니 비관하지 말라’(사형선고 후 면회 온 가족들에게) 라고 말하며 장의사는 35여 년을 한 치의 흩트림 없이 조선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국내 무장독립투쟁의 선봉의 한 분이다.

1919년 3·1 독립만세 운동 후 일본의 강압무단통치로 기세등등할 때인 1927년 10월 18일 오전 11시 20분께 대구 중앙통의 조선은행 대구지점의 폭발사건은 다시 한번 일본 경찰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 창려 장진홍 의사 사진.
장진홍 의사는 1895년 6월 6일 칠곡군 인동면 옥계동(현 구미시 옥계동 4공단 확장단지 인근)에서 인동 장씨 황상파 29세손으로 3남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이 지역의 부농의 집안에서 3남 중 장만으로 출생, 인명초등학교에 입학해 지역 우국지사인 장지필 선생의 가르침을 받으며 조국의 현실을 깨닫고 애국심을 길렸다고 전해진다.

1914년 조선보병대에 입대해 군사전술을 익히고 1916년 제대해 고향에서 평생동지인 이내성과 함께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비밀조직인 광복단에 가입해 지역에서 활동하면서 일경의 감시가 심해지자 만주로 망명했다.

광복단은 ‘오등(吾等)은 대한독립과 국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죽음으로써 결의하고 구적(仇敵) 일본을 완전히 구축하기로 천지신명께 서(誓)함’이라는 선언문에서 밝힌 바와 같이 무장투쟁으로 독립을 쟁취하는 노선을 전개했다.

1918년 만주 봉천에서 이우필, 김정목 등 광복단 동지들과 만나 무력투쟁을 결의하고 러시아 하바롭스크 등지에서 한인 청년 80여 명을 모아 보병조전을 설치하고 군사훈련을 시켰으나 러시아의 내전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고국으로 돌아왔다.

1919년 3·1만세 운동이 전국에서 일제히 일어나면서 일제의 탄압이 극심해지자 의사는 행상을 가장해 각지를 다니면서 일제의 학살, 고문 등 만행을 수집해 기록해 그해 7월 미군함이 인천에 입항하자 ‘일제만행조사서’를 하사관이었던 지인 김상철에게 건네 영문으로 번역해 세계에 알리도록 했다.

그 후 부산에서 조선일보 지국 운영, 매약행상(약장사)을 하면서 민중 계몽과 조선 독립의 정당성을 알리며 다니다가 이내성의 소개로 일본인 무정부주의자 굴절무삼랑을 만나 폭탄제조기술을 배워 고향 옥계동으로 돌아와 몇 차례 실패 끝에 폭탄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1927년 10월 16일 장의사는 폭탄 6개를 만들어 다음날 17일 한 개는 집에 두고 자전거로 대구로 이동해 10시께 화전동 덕흥여관 2호실에서 마지막 거사 계획을 마무리했다.

다음 날인 18일 오전 10시께 폭탄을 점화해 꿀 상자로 위장해 여관에서 일하는 박노선에게 조선은행, 도청, 식산은행, 경찰부로 배달하게 했으나 불행히도 조선은행에 배달된 1개의 꿀상자에서 화약냄새를 맡은 일본인이 도화선을 끊고 박노선을 실랑이하는 사이 복도에 둔 나머지 3개의 폭탄이 연쇄적으로 터졌다.

이것이 유명한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발사건으로 의사는 피신 후 안동, 영천 등지에서 2차 의거를 계획했으나 실패하고 1928년 2월 일본 오사카에서 안경공장을 하는 동생 의환씨 집으로 몸을 숨겨 일본 경시청 중의원 폭파계획을 하다가 1929년 2월 14일 대구에서 파견된 최석현 등 조선인 형사 3명에게 체포돼 대구로 압송되고 말았다.

‘일제가 조선을 해방시켜주지 않으면 너희 일본도 망할 날이 머지 않을 것이다’. ‘조선 민족의 피를 받은 자로서 일제의 앞잡이 주구가 되어 동족의 독립운동을 방해하는 너희들 악질 조선인 경관들은 나의 죽은 혼이라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라며 장의사는 온갖 고문에도 오히려 조선 독립의 정당성과 취조 경찰들을 꾸짖었다고 한다. 재판 중에도 몰래 손에 쥐고 온 돌을 일본 재판정을 향해 던지며 독립만세를 외치는 장의사의 기개와 사형선고 후에서 전혀 흔들림 없는 의지는 독립의 주춧돌이 됐다.

1930년 2월 17일 1심인 대구지법에서, 4월 24일 대구복심법원, 7월 21일 서울고등법원에서 사형 언도를 받고 집행 하루 전 인 7월 31일 옥중에서 순국했다.

일제에 죽느니 내 손으로 죽겠다던 의사의 소신대로 자결을 선택한 것이다.

장 의사는 후손으로는 장손자인 장상규씨 (1938년 생)가 광복회 경북도지부 칠곡·고령·성주연합지회 회장으로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다.
창려 장진홍 의사 옥중 서신(동생 진환씨에게 보낸 편지)
상규씨의 아버지 형옥씨는 (1916~1999)는 어릴 때 어머니 손에 잡혀 대구교도소에 수감 중인 장 의사를 면회 다니면서 아버지 장 의사의 조선 자주독립의 뜻을 이었다고 한다.

해방 후 아버지는 장 의사의 ‘조국 자주독립’의 뜻을 널리 알리기 위해 평생을 아버지 장의사의 행적을 발굴하는 데 일생을 바쳤다고 한다. 아버지는 해방 후부터 서울을 수십 번 오르내리고 전국에 흩어진 할아버지의 동지들을 찾아 행적을 정리하느라 집안일은 어머니께서 모든 일을 도맡았다고 기억했다.

이러한 장 의사의 국내외 독립활동을 정리한 아버지의 노력으로 1949년 5월에 순국 20주년을 맞이해 인동면사무소에서 ‘창려 장진홍 기념사업회 발기 준비위원회’가 창립하고 인동 서부초등학교 교정에서 추모제가 열었다.
훈장 증서
그러나 이듬해 전쟁이 발발해 아버지는 1·4 후퇴 고향인 옥계동을 떠나 왜관읍에 자리 잡았으나 어수선한 국내 사정으로 1962년 3월에야 독립유공자로 건국공로훈장이 추서됐다.

독립유공자들의 후손들은 학비가 면제되는 덕분으로 후손 10남매는 어머니의 억척으로 모두 고등학교 이상 학업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상규씨는 아버지의 평생소원은 할아버지의 동상 건립이었는데 돌아가신 후 2001년 옥계초등학교 앞에 건립했다가 2015년 4월 25일 동락공원 현 위치로 이전하면서 아버지의 평생 뜻을 이뤘다고 말했다.

이제 은퇴한 상규씨는 왜관읍의 한 조그만 아파트에 거주하면서 “지역 독립유공자들의 행적 발굴과 할아버지의 훈장조정 신청을 해볼까 합니다” 며 조심스러운 말을 꺼냈다. 또 “아직도 해외에 흩어져 있는 독립유공자 후손들을 찾아 국적 회복과 온전한 유족 대우를 해주는 정책을 수립하는데 마지막 여생을 보내고 싶다”라면서 “ 광복회가 어떤 단체인지 국민이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한 실정이다”라며 “광복회 단체의 위상정립과 선조들이 피 흘려 되찾은 조국을 사랑하는 운동에 힘을 보태겠다”라고 말했다.
하철민 기자
하철민 기자 hachm@kyongbuk.com

부국장, 구미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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