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등(吾等)은 자(玆)에 아조선(我朝鮮)의 독립국(獨立國)임과 조선인(朝鮮人)의 자주민(自主民)임을 선언(宣言)하노라…(우리는 오늘 조선이 독립한 나라이며, 조선인이 이 나라 주인임을 선언한다…)”로 시작하는 ‘독립선언서’는 1919년 3·1운동 당시 독립의 당위성을 밝히고 독립국으로서의 조선, 자주민으로서의 조선인임을 선언한 글이다. 지난날 고등학교 학생 때 삼일절이 되면 한 번씩 외어보던 선언문이다.

‘기미독립선언서’라고도 부르는 이 선언문은 손병희 최린 등 천도교 지도자가 중심이 돼 기독교 불교 등 종교단체 대표에게 독립운동에 참여할 것을 독려한 글이었다. 독립운동 계획 당초에는 건의서 형식으로 일본 정부에 대해 독립을 요구하기 위해 발의됐다. 이에 대해 최린은 건의서는 민족자결의 의미가 없기 때문에 강력한 독립선언 의지와 당위성을 담아 국내외에 알려야 한다고 주장, 선언서가 됐다.

1919년 2월 초 최린과 송진우, 현상윤, 최남선 등이 협의한 끝에 초안 작성은 최남선에게 위임됐다. ①평화적이고 온건하며 감정에 흐르지 않을 것 ②동양의 평화를 위해 조선의 독립이 필요하며 ③민족자결과 자주독립의 전통정신을 바탕으로 정의와 인도(人道)에 입각한 운동을 강조해야 한다는 손병희가 세운 선언서 작성의 대원칙에 따르도록 했다.

논란은 여전하지만 친일반민족 행위자로 낙인찍혀 있는 최남선이 대원칙에 따라 독립선언서 초안을 만들었다. 최남선은 당시 조선 지식인 천재 삼인방의 한 사람으로 동경에 유학한 춘원 이광수, 벽초 홍명희와 함께 ‘동경삼재(東京三才)’로 불렸다. 최남선은 일경의 눈을 피해 광문회 소속 임규의 일본인 부인의 안방에서 약 3주일 만에 초고를 써서 최린에게 전했다. 최린은 2월 27일 손병희 등의 동의를 받아 민족대표 33명의 추인을 끝냈다. 선언서 뒷부분의 공약 3장은 한용운이 따로 작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독립선언서를 쓴 사람이 변절할 정도의 살벌했던 당시 시대 상황 속에 써진 명문장 ‘독립선언서 손으로 쓰기 운동’이 만세운동처럼 전국적으로 번지고 있다. 한 자 한 자 써보면서 진정한 독립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어서 한 번 써보길 권하고 싶다.


이동욱 논설실장 겸 제작총괄국장
이동욱 논설주간 donlee@kyongbuk.com

논설주간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