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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선규 대구교대 교수
“책 속에 길이 있다”, 어릴 때부터 자주 들어온 이야기입니다. 아마 “아는 것이 힘이다”와 한 짝을 이루는 말씀이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어느 정도 살게 된 것도 어쩌면 그런 ‘지혜를 찾고 지식을 쌓는 부단한 노력’의 결과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교육입국(敎育立國)의 한 성공 사례 같기도 하고요. 그런데 요즘 일련의 사태가 그런 자부심에 찬물을 끼얹고 있습니다. 어렵게 이룬 물질적 성공의 뒤안길이 너무 누추합니다. 공부 잘해서 높은 자리에 오르고 재주가 있어 대중의 인기를 얻은 자들이 보여주는 행태가 너무 추악합니다. 윤리감각이 마비된 타락한 인성(人性)의 소유자들이 벌이는 온갖 금수만도 못한 비행들로 나라 전체가 혼돈의 도가니입니다. 이 혼돈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앞이 캄캄합니다. 이 모든 것이 교육이 잘못된 탓입니다. 제가 평생을 교육자로 살아온 입장이라 더욱 그렇습니다. 아무리 헐벗고 살았어도 교육은 제대로 했어야 했습니다.

주역(周易)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사서삼경(四書三經) 중의 하나입니다. 예부터 주역은 수양서이면서 동시에 점복서인 것으로 인정되어 왔습니다. 옛 선비들은 주로 수양서로 여겼습니다. 그 책을 보면서 자신의 상처와 대면하고 자기를 비우는 일에 힘썼습니다. 사람살이에 요구되는 타자공동체를 위한 윤리적 실천에 대해서 숙고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공동체의 앞날에 대해서도 염려 섞인 예측을 해 왔습니다. 주역을 예언과 점복에 대한 기록으로 보기에 앞서 언제나 자신을 비추는 거울로 여겼습니다. 그런 식의 ‘내부 정보를 환기하는’ 읽기가 우선했기에 지금도 주역의 가치가 보전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수천 년 전의 기록이지만 아직도 현재의 거울로 작용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렇습니다. 그렇게 ‘거울로 읽는 주역’의 절차(과정과 태도)를 제 방식대로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육효(六爻)에 대한 주석과 해석(효사)를 읽어나가면서 특별히 심금을 울리는 것이 있으면 그것을 부여잡고 깊이 음미합니다. 육효의 연관성이나 그것들이 총체적으로 만들어내는 게슈탈트(총체적 의미)를 잡아내는 일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므로 미리부터 그 일에 집착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그 일이 최종 목표라는 생각을 버리면 안 됩니다. 전체 속에서 하나를 찾고, 하나를 전체로 확대하는 작업을 부단히 수행합니다. 그러다 보면 눈앞에 어떤 ‘통일성’이 나타납니다. 그 통일성이 거(居)하는 맥락을 살피고 그 안에서 내가 처한 입장을 찾습니다. ‘내 입장’을 찾을 때는 반드시 논리로 찾지 말고 직관으로 찾아야 합니다. 자칫 논리에 매달리다 보면 자기 합리화나 나르시시즘에 함몰되어 반대 방향으로 해석할 수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마지막 한 줄’에 집중합니다. 앞선 모든 해석과 유추를 뒤집을 수 있는 ‘한 줄’이 있는지 살핍니다. 있다면 모든 것을 버리고 그 ‘한 줄’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그것 하나에만 집중합니다. 그 ‘한 줄’이 왜 그렇게 자기를 주장하는지에 대해서 숙고합니다. 이때 유의할 점이 책을 펼칠 때의 내 욕심, 내 기대와 희망이 무엇이냐는 것을 아는 일입니다. 위로와 위안이었는지, 촉구와 격려였는지, 기대와 희망이었는지, 그런 것들을 점검합니다.

능숙한 독자들은 보통 막판에서 자신의 생각을 뒤집습니다. 애써 책에서 찾은 길을 걷어찹니다. 그 대신 자기를 찾습니다. 책 속에 길이 있고, 아는 것이 힘이라고만 가르치면 책 속에서 자기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런 교육으로는 사람을 만들지 못합니다. 책 속에는 길이 없고, 아는 것이 힘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야 합니다. 그런 교육이 우리를 살리는 교육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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