엎드려야 보이는
온전히 몸을 굽혀야 판독이 가능한 전(典)이 있다
서 있는 사람의 눈에 읽힌 적 없는
오랜 기록을 갖고 있다
묵언의 수행자도, 맨발의 현자도 온전히 엎드려야만
겨우 몇 글자를 볼 뿐이다
어느 높은 빌딩에서 최첨단 확대경을 들이대고
글자를 헤아리려 들었지만 / 번번이 실패하였다
일찍이 도구적 인간의 탄생 이후
밤새 달려야만 수평선을 볼 수 있다고 믿게 되면서
바닥은 사람들에게서 점점 더 멀어졌던 것이다
온전히 걷지 못하는 사람들이
울긋불긋 방언을 새겼던 것이다
빗물이 들이치고 폭풍이 몰아치면서
웅덩이가 패었고 글자들이 합해졌거나 떨어져나가
텍스트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일생을 대부분 엎드려 산 사람은
상형문자가 되어버린 이 경전을
판독해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고 한다
다만 손끝으로 감아올린 경전經典의 구와 절에
바닥이 힘껏 이빨을 박고 있어 애를 먹을 뿐이라는 것이다





<감상> 밑바닥 인생은 바닥이 변하지 않는 경전(經典)인 걸 안다. 바닥 경전은 온전히 몸을 굽혀야 판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낮추고 엎드려 산 사람만이 방언들과 상형문자를 새길 수 있고 판독할 수 있다. 바닥이 경전 위에 존재하므로 묵언의 수행자도, 맨발의 현자도 겨우 몇 글자를 볼 뿐이다. 더욱이 우뚝 서서, 혹은 높은 빌딩에서 지배하는 자들은 문명의 이기로 해독하려해도 실패하고 만다. 이들은 비주류를 경계하고, 주류를 지향할 뿐이다. 한 번도 바닥을 경험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몸을 낮추어 이해하려 들지도 않는다. <시인 손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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