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믿음 '하나님의 나라' 천당이 아니라 현세의 편안 낮고 천한 이웃 사랑하는 것

김정모 서울취재본부장

서울역 광장에는 하루도 빠지지 않는 게 있다. 눈이 와도 비바람이 불어도.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간절한 외침이다. 대곡(大哭)은 아니어도 방성(放聲)이다. 그 절규에 귀 기울이는 사람이 없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예수의 동정녀 마리아 탄생, 장사한지 사흘 만에 부활, 하나님(神)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어서인가.

대조적으로 광장 한구석에 공짜 밥을 퍼주는 데는 장사진을 이룬다. 1세기 전에 죽은 톨스토이가 이를 목격한다면 "배고픈 세상에 가득한 사람들, 신은 빵의 형태가 아니면 그들의 앞에 나타날 수 없다."라는 유명한 자신의 말에 확신을 가질 법도하다.

구세군 종소리가 요란하고, 성탄절 트리와 캐럴이 웅장하다. 기독교가 들어 온지 100년이 넘어 크리스마스는 한국의 풍습이 됐다. 이제는 최소한 '역사적 예수'(historical Jesus) '인간 예수'(the man Jesus)를 통째로 부정할 사람은 없다. 예수가 주창한 '예수의 믿음(faith of Jesus)'은 흐릿하게라도 긍정한다. '예수에 대한 믿음(faith about Jesus)'을 가진 기독교인들과는 본질이 다르지만.

그 예수의 믿음은 '하나님 나라(神國, 天國)'다. 죽고 나서 가는 천당이 아니라 현세의 편안(comforting)이다. 뒤죽박죽이고 혼란한 사람도 믿음과 마음먹기에 따라서 누린다. '소유냐 존재냐'라는 명제를 던진 에리히 프롬의 관점처럼 소유하는 게 아니라 존재, 즉 현재 있음을 즐기는 것인지도 모른다.

톨스토이는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The Kingdom of God Is Within You)"라는 구절에 감성(feel)이 꽂혀 자신의 죽음조차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인도의 간디는 톨스토이의 독창사상에서 힌트를 얻은 비폭력 투쟁 '샤티아그라하(진리의 힘)'에 일로매진하다 암살됐다. 자신의 공동체 '아슈람'에 당시 인도의 관습과 법적 구속에 의해 격리되는 불가촉천민(不可觸賤民)과 나뒹굴며 살았다. '20세기 한국의 스승' 함석헌 선생도 '씨알사상'이라는 비폭력, 민주, 평화 이념을 제창하고 몸소 실천했다.

그 예수의 믿음은 이웃사랑이다. 스스로 세상 밑바닥에 있는 창녀 세리 시정잡배들을 찾았다. 높고 귀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낮고 천한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란다. 강도 만나 죽어가는 사람을 구해준 세상이 멸시하는 선(善)한 사마리아인의 사랑이다. 얼굴을 돌리고 지나간 거룩한 제사장 레위인이 결코 아니다.

그 하나님나라는 오지 않았고, 이웃사랑은 사막처럼 건조하다. 눈물 묻은 가슴으로 땀내 나는 몸으로 사는 이들은 교회당마저 의지처가 못된다. 흙 묻고 헤진 옷차림의 행색을 한 이들에겐 현란한 성직자조차 다가오는 이가 없다. 톨스토이나 함석헌은 낮고 천한 곳으로 다가갔고, 마르크스나 볼세비키들은 노동자와 프롤레타리아 이익을 위해 아래로 내려갔는데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에 대해서 진짜로 아는 이가 누가 있겠나. 장님 코끼리 만지듯이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고려 말 타락한 불교에 대한 종교개혁이 정도전의 <불씨잡변(佛氏雜辨)>이라고 본다면, 다시 <기씨잡변>이라도 나와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알 수 있을까.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