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룡포 바닷바람과 햇볕이 만든다…손은 거들 뿐

▲ 제일국수의 '맛의 비결'은 간간한 해풍과 따뜻한 햇빛으로 자연 건조 시키는 데 있다.

바람과 햇볕이 재료였다.
포항시 남구 구룡포읍 구룡포시장에 자리잡고 있는 제일국수공장의 이순화(76)씨에겐 그랬다.
이씨의 국수 재료는 다른 국수집과 마찬가지로 물·소금·밀가루 뿐이다. 다른 것이 있다면 실내에서 열풍 건조로 만들어지는 보통 국수와 달리 오로지 동해에서 불어오는 맑은 해풍과 햇볕만으로 말린다는 점이다.
그래서 별명도 해풍국수다.


"덥거나 날이 꾸무리할(궂을 때)는 소금을 적게 넣고요, 바람이 약하거나 춥을(추울) 때는 소금을 많이 넣니더."

국수를 사려면 한 달은 기다리기 일쑤인 국수 명장의 비법이라기엔 너무 단순한 답이었다.

"바람이 강하고 습도가 높으면 물을 많이 넣어 반죽을 질게 하고, 비가 오거나 구름이 끼면 물을 적게 부어서 반죽을 되게 하니더."

하지만 단순한 대답과는 달리 45년간 오로지 국수만들기에만 정성을 쏟아온 이순화할머니만의 노하우가 숨어 있다는 뜻이다. 즉 날씨에 따라 소금 농도는 물론 반죽에 들어가는 물의 양과 국수 두께까지 달리함으로써 해풍국수의 품질을 지켜왔다.

그의 노하우는 여기서 그치는 게 아니다.

이런 반죽을 만든 국수를 건조하는 것까지도 날씨에 따라 너는 간격까지도 다르게 한단다.

계절에 따라, 그 날의 바람과 햇빛, 습기와 온도 등에 따라 달리 한다는 최적의 조합은 이씨가 어림짐작으로 결정한다고.

국수를 만든지 마흔하고도 다섯해. 이씨는 소금물에 맨손을 담그는 것만으로 그 염도를 정확히 구분해낸다.

그러니 간단한 듯 보이는 맛의 비결은 사실 간단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현대식 공장에서 국수는 7~8시간이면 대량으로 만들어낸다. 컨베이어 벨트와 열풍기를 이용하기 때문이다.

▲ 깊은 주름이 내려 앉고 관절이 뒤틀린 이순화씨의 손.

이에 반해 제일국수공장의 면은 아무리 짧아도 이틀은 걸린다. 한 번에 20㎏ 밀가루 15~20포 가량을 쓰는데, 거의 모든 일을 손으로 하는 데다 국수의 품질을 좌우하는 건조에 공을 들이는 탓이다.

반죽을 하고 재래식 기계에서 면을 뽑아내는 것만도 한 나절. 이후 야외 건조장에서 해풍으로 반건조 상태가 되면 창고에 넣어 숙성시키는 데 이 시간만 15시간 가량.

이를 새벽에 꺼내 다시 널어 완전 건조 과정을 거친 후 알맞은 크기로 자르기까지 또 한 나절.

흐리거나 바람이 약하면 사나흘도 걸린다. 이렇듯 철저한 자연 건조 덕에 삶아 놓으면 탱탱하고 쫄깃하다.

면발은 살아있는 듯 입안에서 착착 감긴다.

삶을 때도 전분 찌꺼기가 뜨지 않고, 삶은 면은 실온에 보관해도 엉켜 붙지 않는다.

"제일국수만 쓴 게 한 35,6년 쯤 됩니다. 공장 면발이랑 확실히 다르죠."

그 역시 소문난 맛집인 구룡포 '할매국수' 이상교(50)씨의 말이다.

구룡포에서 면 요리로 유명한 맛집 대부분은 제일국수를 쓴다.

처음에는 옹기 장사였다.

2남 3녀중 장녀로 경주 감포에서 나고 자라 스물넷에 구룡포로 시집오면서 옹기 가게를 열었다.

시장통이 지나는 골목,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배기.

바로 지금 국수공장이 있는 자리다.

여러 해가 흐르고, 아버지가 감포에서 우체국장을 거쳐 읍의원까지 지낼 정도로 '귀하게' 자란 이씨네 맏딸이 옹기 장사나 한다는 쑥덕거림이 더는 듣기 싫었다.

둘러보니 국수공장의 벌이가 좋아 보였다.

국수공장이 이미 여섯 군데나 들어서 있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잔치' 한 번이면 국수가 사과 상자로 너댓 궤짝쯤은 우습게 나가던 시절이었으니까.

술 좋아하고 사람 좋아하던 남편 탓도 있었다.

"국수일을 살펴보니 일이 많아서 국수쟁이를 하면 안 도와주겠나 했니더. 뒷일은 어쨌든 면만 빼주면 나머지는 내가 할라캤지."

옹기를 치우고 밀가루 포대를 들였다.

그것이 1971년 제일국수공장의 시작이었다.

지금도 쓰고 있는 추저울도 그 때 장만한 것이고, 손글씨로 새겨 이제는 고풍스러운 멋마저 풍기는 간판도 그 때 내건 것이다.

호기롭게 시작했지만 반죽이며 면발 뽑는 일은 쉽지 않았다. 요즘으로 치면 중국집 주방장 마냥 그 시절 국수집은 대개 '기술자'를 뒀다. 이씨 역시 기술자를 모셔다 일을 배웠다.

자라던 두 딸과 두 아들도 일을 도왔다.

3년 가량 머물던 기술자가 그만둔 후 일은 온전히 가족의 몫이 됐다.

벌이가 좋았는지 어쨌는지 헤아려 볼 틈도 없었다.

한새벽에 깨어나 초저녁을 살풋 넘기면 까무룩 잠드는 나날이었다.

"그 때는 우리 국수가 제일 맛 없고 일하는 것도 굼뜨고 그랬니더."

거기서 열 몇해.

쉰을 갓 넘긴 남편이 롤러에 끼여 손가락을 잃으면서 일을 완전히 놓았다.

아이들은 학교를 다녀야했다.

반죽과 제면과 건조와 재단과 포장까지 국수만들기의 모든 과정을 이씨 혼자 떠안았다.

힘든 일 그만두고 같이 대처로 나가 살자던 '대보국수방'의 '언니'를 마지막으로 다른 국수공장은 모두 문을 닫았다.

남편이 세상을 뜨고, 딸들은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고, 아들들이 '상무'와 '소장'이 되고 어느 덧 자란 맏손자가 제대하기까지 이씨는 처음의 자리에서 내내 국수를 만들었다.

여전히 새벽 4시 반이면 깨고, 밤 9시 뉴스를 보다 잠든다.

그런 이씨의 제일국수공장이 수년전부터 수시로 매스컴에 오르내리며 전국적인 유명세를 치르고 있다.

지난 2009년 초 포항 출신 가수 함중아씨가 한 TV프로그램에서 특별한 고향의 맛으로 소개한 이후부터다.

사가려는 이들은 줄을 서는 데 물량이 많지 않았다.

전화로 주문하면 한 달 가까이 기다리는 건 기본이고, 직접 공장을 찾아도 630 두 묶음, 10인분 가량만 살 수 있다.

이런 품귀 현상은 얼마 후면 조금 나아질 지도 모르겠다.

이씨의 장남인 하동대(47)씨가 현재의 '본점' 외에 '2공장'을 물색 중이기 때문이다.

하씨는 3년전 국수일을 하기로 마음 먹고 구룡포로 돌아왔다.

하씨가 가업을 잇기로 하면서 제일국수공장은 지난 2014년에 '향토뿌리기업'으로 선정됐다.

대를 이어 30년 이상 전통적인 제조방식으로 운영할 것 등을 조건으로 하는 향토뿌리기업은 경북 전체에 43개가 있고, 포항에선 제일국수공장이 유일하다.

"혼자서 그 일을 다 하셨거든요. 억세고, 악바리고, 여장부죠. 아침에 일어나 잠들 때까지 한시도 쉬지 않아요."

하씨는 어머니 이씨를 같이 일하기엔 사실 피곤한 분이라며 씨익 웃는다.

취재를 위해 이틀을 찾는 동안 정말이지 이씨가 쉬는 걸 볼 수 없었다.

옥상에서 오징어를 널고 내려오더니 언 손 한 번 녹이지 않고 국수를 포장하는가하면 국수를 싸다가도 주방에서 오징어 배를 갈랐다.

대꾸를 하는 중에도 재게 놀리는 손에 흐트러짐이 없다.

국수 안 만드는 날엔 좀 쉬지 않냐는 물음에 더 바쁘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국수 묶어야죠, 바닥 쓸어담아야죠. 내가 일이 많니더."

포구의 해풍과 햇볕은 이씨에게도 스며들었다.

손에는 깊은 주름이 내려앉았고 마디마디가 뒤틀렸다.

오십여년을 구룡포에 살면서 호미곶에 놀러간 게 딱 두 번 뿐이라고.

슬레이트 지붕의 단층 가게를 2층 건물로 바꾸고 건조장도 넓혔으니 만족한다고 이씨는 말한다.

"이 일로 밥 벌어먹고 남한테 손 안 벌리는데 그거면 된 거 아잉교."

▲ 처음 공장을 열 때 내건 현판이 아직 걸렸다. 당시 친분이 있던 구룡포우체국장에게 부탁해 만든 것이다. 정승훈기자 route7@kyongbu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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