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자 아닌 사람이 없는 마을…600년 역사가 숨쉬는 명가

▲ 광산김씨 예안파 김부필 종가가 자리잡은 안동 군자마을. 원래 종가와 부속 건물들이 안동 예안면 오천리에 있었지만 안동댐 건설로 이곳으로 옮겨왔다.
"오천 한 마을에는 군자 아닌 사람이 없다."

안동에서 도산서원 방면으로 국도 35호선을 타고 18㎞ 지점에 이르면 '안동 군자마을'이 나온다. 이곳은 광산김씨 예안파의 집성촌이다. 산 중턱에 자리잡아 전망이 좋고, 마을 앞으로는 호수가 보이는 시원한 풍광이 인상적이다. 마을 입구엔 '선경유방 유장백세'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선을 행하고 쌓음으로서 집안 경사가 있고 그 가풍이 영원히 이어진다는 뜻이다.

원래 안동 예안면 오천리(외내)에 있었으나 안동댐 건설로 인해 이곳으로 옮겨왔다.

'학문과 도덕을 우선하는 가문'이 바로 광산김씨 예안파의 전통이며 자부심이다. 그 중심에 김부필(1516∼1577)이 존재하고 있다.

김부필의 본관은 광산이며 자는 언우(彦遇), 호는 후조당, 시호가 문순공(文純公)이다. 후조당이란 당호는 그의 호를 따서 붙인 것이다.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공부하였고, 정계에는 뜻이 없어 관직을 사양하고 응하지 않았다.

김부필은 '굳은 절개의 인물', '벼슬이 내려와도 즐거워하지 않은 인물' 등으로 알려지고 있다.

1556년(명종 11) 41세의 나이로 이황의 문하에 들어갔다. 여러 차례 벼슬이 내렸지만 사양하고 학문에 정진했다. 이에 이황이 "후조주인(後彫主人)은 깨끗한 절개를 굳게 지켜, 임명장이 문전에 이르러도 기뻐하지 않는구나…"라는 시를 지어 그의 지조와 절개를 높이 평가했다.

순조 때 이조판서에 증직되고 '문순공'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이곳을 '군자리(마을)'라 부르는 이유는 안동 예안에 정착한 입향 시조인 김효로 이후 3대 만에 광산김씨 문중은 명문으로서 자리를 굳히게 되는데 이후 세칭 '오천 칠군자'가 배출됐기 때문이다.

이들은 후조당 김부필, 읍청정 김부의, 산남 김부인, 양정당 김부신, 설당 김부륜, 일휴당 금응협, 면진제 금응훈을 이르는데 이들은 김효로의 친손과 외손들로 모두 퇴계 이황의 제자들이다.

당시 안동부사였던 한강 정구가 '오천 한 마을에는 군자 아닌 사람이 없다'라고 '선성지'에 기록하면서 지금도 후조당이 자리잡은 화룡면 오천리는 '군자리', 혹은 '군자마을'로 불리고 있다.

후조당은 원래 김효로의 옛집이었는데 오래되어 낡은 것을 김부필이 새로 수리하면서 '후조당'이라는 이름을 붙였으며, 후조당의 편액은 퇴계 이황의 친필로서 그가 퇴계의 신임을 받던 제자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 광산김씨 예안파 종택에 딸린 별청 건물 '후조당'


△전통과 역사가 보물처럼 간직된 곳

후조당은 김부필의 호이자 안동 예안면 오천동에 집성촌을 이루고 살던 광산김씨 예안파 종택에 딸린 별청 건물이다. 후손들은 안동댐 수몰로 보상 받은 돈으로 새로운 집과 땅을 살 수도 있었지만 고려 말부터 지금까지 20여 대(代)에 걸쳐 이어져온 후조당 600여 년의 역사를 포기하지 않고, 후조당을 비롯해 정자, 종택, 사당 등 마을의 주요 건물 20여 동을 함께 이전해 유서 깊은 문화재 단지로 만들었다.

이곳에는 값으로 매길 수 없는 귀한 역사적 보물들이 즐비하다.

후조당 대청의 천장에서는 고서와 문집류, 고려 말기의 호적, 조선시대의 호적과 교지, 토지문서, 노비문서, 분재기, 각종 서간류를 비롯해 희귀한 전적류 수천여점이 발견됐다. 이 유물들은 하나같이 보물로 지정될 만큼의 가치를 지니고 있으나 워낙 가짓수가 많아 일일이 지정할 수가 없어 일괄 지정되었다고 한다.

이 가운데는 '퇴계선생유묵'을 비롯해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고려 초기의 호구단자, 최초의 전통요리서인 '수운잡방', 임진왜란 때 의병장의 진중일기인 '항병일기', 전투지휘관의 복무지침서인 '행군수지 등은 군자리의 자랑이다.

후조당을 보면 진정한 유산이란 물질적 풍요가 아닌 자손 대대로 내려오는 소중한 역사와 전통임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한다.

광산김씨 예안파 종가는 지난 2014년 600년에 걸쳐 보존해오던 고서·고문서 등 5천여 점의 소장자료를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했다. 이중 국가지정 보물만 20종 490여점에 이른다.

▲ 안동 군자마을 내 후조당 안채 복원 예정지.


△40년 만에 제모습 찾은 후조당

안동댐 건설로 수몰될 위기에 놓여 이건됐던 광산 김씨 종중 종택인 후조당이 40년 만에 제 모습을 갖출 수 있게 됐다.

중요민속문화재 제227호인 후조당은 안동댐 건설로 1974년 예안면 오천마을에서 지금의 와룡면 군자마을로 옮겨지면서 사당과 별채, 사랑채, 정자 등은 이건, 보존돼 있으나 '안채'는 이건되지 않아 반쪽짜리 집으로 40년을 지내왔다.

광산김씨 예안파 종중은 종택인 후조당 안채를 복원하기 위해 문화재청으로부터 국비 등 10억원을 지원받아 놓고 있으나, '산지관리법'상 자연환경보존지역 등 개발행위 제한에 묶여 건축행위가 어려워 복원 사업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이에 국민권익위원회는 안동 와룡면 군자마을을 찾아 산지법에 묶여 건축행위를 못 하는 후조당 안채 복원에 대한 민원 조정회의를 가진 뒤 합의를 이끌어 냈다.

김석중 19대 종손은 "지난 2011년에 작고하신 아버님께서는 '종가 안채가 없는 것이 매우 안타깝다'고 말씀하셨다. 오늘 조정협의를 시작으로 발 빠르게 행정절차가 추진돼 하루빨리 안채가 복원, 후조당이 제 모습을 갖추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18대 종손인 김석진 옹은 오천유적지 군자마을의 이건과 보존의 산 증인이자 주역이었다. 유도회 회장, 성균관 부회장, 안동문화원 원장 등을 역임하며 평생 전통문화와 선비정신 창달에 헌신했다. 광산김씨 예안파의 족장으로 문중 발전을 이끌었다.

김석중 종손은 부친이 후조당 안채 이건을 못보고 운명하신 게 마음에 걸린다고 했다.
오종명 기자
오종명 기자 ojm2171@kyongbuk.com

안동 담당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