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과 타협 않는 청렴·강직함 이어받은 독립운동가 집안

▲ 의성 김씨 남악종택(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 제248호).

예천 용문면에는 마을 앞 개천이 아홉 여울로 됐다 하여 구계(구렐)라고 하는 마을이 있다. 이 마을 집들은 모두 반듯반듯하여 옛날부터 '구렐 가서 집 자랑하지 말고 금당실 가서 옷 자랑 하지 마라'는 속담이 있다고 한다. 이곳에는 조선 중기 문신이자, 퇴계 이황의 문인인 남악(南嶽) 김복일(金復一:1541~1591)의 종택이 있다.

6일 오전 11시 예천군청 이재완 학예사와 남악종택(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 제248호)을 방문했다.

"예를 가장 중시하고 청렴함과 강직함을 치면 될 것입니다. 남악 어른은 관료 직에 계실 때도 불의를 보시면 참지 못하고 권력과도 타협을 하지 않는 성품이다"며 김종헌(70) 15대 종손과 김위매(69) 종부는 찾아 온 낯선 이방인들에게 방석을 내주며 집안의 가훈에 대해 말했다.

김종헌 종손은 "한문과 서예(추사체) 공부를 하루도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며 추사체 연습을 하고 있는 수첩을 보여 주었다.

"알파고와 인간의 바둑대결을 보면서 인간이 기계에게 종속되는 것 같아서 섬뜩한 느낌을 느꼈다"는 김위매 종부는 그래도 우리 선현들의 지혜는 따라올 수가 없고 유가의 사상은 기계도 할 수 없을 것이다"고 말했다. 또 "옛것을 중시하고 기계가 하지 못하는 것들이 아직도 많이 있다"라며 "특히 충과 효, 인간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들과 서예의 추사체는 기계가 따라 하지 못할 것이다"고 전했다.

남악 김복일은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에서 태어나 예천 용문면 죽림의 초간 권문해의 누이와 결혼해 이곳에 터를 잡았다. 용문면은 조선 태조가 도읍지로 정하려고 했던 곳 중의 하나로 정감록에는 "예천 용문은 우리나라 십승지지(十勝之地)의 하나로 병화(兵火)가 들지 못한다"고 해 임진왜란 때 온전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이처럼 용문면은 조선시대 사람이 살기 좋은 복된 땅으로 인식되었던 곳이다. 이때 의성 김씨들이 구계리에 정착하면서, 그들이 일구었던 땅을 이르러 '남밭골'이라 지칭하고 있다.

이곳에 정착한 남악선생은 의성 김씨의 오룡(五龍)이라 일컬어지는 인물로, 그의 형제들이 나란히 대과와 소과에 급제하여 당대에 크게 이름을 떨쳤다. 오룡이란 청계(淸溪) 김진(金璡 : 1500~1580)의 아들 약봉(藥峯) 김극일(金克一:1522~1585), 구봉(龜峯) 김수일(金守一:1528~1583), 운암(雲巖) 김명일( 金明一:1534~1569),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1538~1593)과 남악 김복일을 일컫는 말로서, 극일, 성일, 복일 형제는 대과에 급제하였고, 수일, 명일 형제는 소과에 합격해 붙여진 이름이다. 여기에서 막내 남악선생은 처가인 금당실에 살았던 인물로, 1570년(선조 3)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그 뒤 전라도어사로 나가 탐학한 관리들을 숙청하는 일로 이름을 떨쳤다. 이후 그는 경주교수(慶州敎授)가 되어 학생들을 경학으로써 인도하여 도의를 크게 일으켰으며, 풍기군수 등을 지냈다. 이후 그는 안동의 사빈서원과 의성 봉산서원에 제향됐다.

▲ 의성김씨 남악종택 15대 김종헌(70)종손과 김위매(69)종부.


한편, 남악종택은 김복일의 종질이자 병자호란 때 척화신으로 이름난 불구당(不求堂) 김주(1606~1681)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그는 병자호란 때 홀로 척화소(斥和疏)를 올렸고, 이후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과 함께 최후까지 싸울 것을 주장했다. 그 일로 인해 청음 김상헌과 함께 행장을 차려 두고 청나라로 끌려갈 왕명을 기다리다 조정공론으로 풀려날 수 있었다. 이후에도 그는 스스로 오랑캐를 평정하는 글을 짓고, 벼슬에서 물러났다. 유림에서는 그의 절의와 기개를 청음과 같다하여 숭정처사(崇楨處士)라고 호칭하며 존경했다.

1648년(인조 26) 무장(茂長:전북 고창) 현감이 되어 임진란에 허물어진 현청을 녹봉(녹봉)으로 고쳐 지었다. 이러한 공으로 1650(효종 1) 왕은 불구당에게 표리일습(表裏一襲:옷이 겉감과 안감 1벌)을 하사했고, 특히 "부임한 2년만에 가장 잘 다스리는 고을이 되었다"고 칭찬했다. 이후 연안 현감, 양산군수, 함평군수, 양산군수, 첨지중추부사가 되었고 1673년(현종 14) 치사하여 고향인 예천으로 돌아왔다. 이후 70세의 늙은 몸으로도 학문에 침잠하고 후진을 양성함에 온 정성을 다했다.

현재 이들과 연관된 남악종택이 문화재(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 제248호)로 용문면 구계리에 자리잡고 있다. 남악종택은 국사봉의 지맥이 뻗어 내린 나지막한 야산을 배경으로 동남향하여 자리를 잡았다. 정면 9칸 측면 7칸의 ㅁ자형으로 안채와 사랑채가 구성되고, 그 앞으로 ㄱ자로 된 초가 문간채가 배치되어 있다. 안채의 상부 구조는 오량가이다. 대청 왼쪽에 온돌방을 1칸 꾸미면서 골방과 벽을 터서 안방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골방 앞쪽 안방 자리의 일부를 부엌으로 개조했다.

사랑채인 가학루(駕鶴樓)는 정면 3칸 측면 3칸에 팔작기와를 얹은 오량가이다. 앞면의 경사지에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계자(鷄子) 난간을 두어 누각형식의 품격 높은 외형을 가지고 있다. 누하주는 휘어진 곡재를 그대로 사용하고 사랑방의 반자는 우물반자로 꾸몄다. 처마 곡선을 우아하게 처리하여 나란히 서 있는 문간채의 초가와 더불어 아름다운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영남 북부지방 민가의 기본적인 평면을 가진 주택으로 지형의 고저차를 적절하게 이용하였는데 각 공간마다 통풍과 채광이 원활한 쾌적한 평면구성이 특징이다. 사대부 양반가옥의 주택 구성과 건축적 특성을 잘 갖추고 있어 고졸한 멋을 풍기는 가옥으로 민속적 가치가 크다.

1981년 지붕을 고칠 때 '인조 12년(1634)에 용문사의 승(僧) 운보(雲補)가 조성했다'는 내용의 명문(銘文) 기와가 발견돼 이 가옥이 세워진 연대가 확인됐다. 건축연대는 조선 중기로 구전되고 있으나 연산군 때에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낙향한 진주인 류유(柳牖1420~1486)이 세웠다고 전한다. 이 집은 초건 후 누대에 걸쳐 세거해 오다가 전주 이씨에게 전매되었다가 현 소유주인 김용규의 증조부가 다시 사들여 종택으로 삼아 지금에 이르고 있다.

의성김씨는 독립운동 유공자를 85명을 배출한 독립운동에서 대활약을 한 집안이다. 예천 출신으로 독립운동을 한 김병동(金秉東:1858~1928), 김현동(金賢東:1876~1927) 등의 투사가 있다. 이처럼 숭정처사 불구당 선생의 기개와 충의는 후세에 전해져 예천지방의 독립운동을 이끌어내는 데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이상만 기자
이상만 기자 smlee@kyongbuk.com

경북도청, 경북경찰청, 안동, 예천 담당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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