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을 중시하며 대대로 충·효·베풂 실천하는 충신 집안

▲ 예천군 호명면 송곡리에는 후대의 길이 남을 충효를 실천한 연안이씨 이덕창 별좌공종택(경북민속자료 제71호)이 자리하고 있다.
▲ 연안이씨 이응 선생의 제16대 종손 이의선.
예천군 호명면 송곡리에는 후대의 길이 남을 충효를 실천한 연안이씨 이덕창 별좌공종택(경북민속자료 제71호)이 자리하고 있다.

이 마을은 눌헌(訥軒) 이응(李應:1536~1597)과 그의 아들 사고(沙皐) 이덕창(李德昌:1569~1616)이 살았던 곳으로, 현재 연안 이씨들의 집성촌이다.

이응 선생의 16대손인 이의선(83) 종손은 "가훈처럼 특별하게 내려오는 것은 없지만 늘 선대 때부터 기본이 바로서야 모든 것이 바로 서고 복이 찾아온다 며 나라에 충선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며 주위에 베풀는 어진 사람이 돼야한다"고 가르쳤다 고 말했다.

또 "40년 가까이 서울에서 사업을 하다 종택관리를 하지 않아 고서가 다 도둑을 맞아 지금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며"자손들이 거처하고 살아야만 보존할 수가 있는데 아무리 국가에서 관리를 해준다고 하지만 이제는 내 자식들도 종택을 몰라 관심도 없고 내가 이종택의 마지막 종손이 될 것 같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의선 종손은 "무오사화 때 이응 할아버지가 화를 입으면서 집안대대로 벼슬하지마라 세상일에 관여하지말라 는 선현들의 당부의 말이 있었다"고 했다.

이의선 종손은 종부와 떨어져 홀로 살고 있다.

40년 가까이 서울에서 사업을 하다 건강이 안 좋아 지금은 고향 종택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

이유, 이희, 이덕창의 부친 이응, 삼형제는 퇴계 이황선생의 제자들로 임진왜란 때 모두 의병으로 참여해 맏형 이유는 도망간 예천군수 대신 예천 수성장(守城將)을 맡아 지키다 용궁전투에서 전사하였고, 둘째 형 이희는 이 사실을 조정에 알리러 상경하던 중 쌍령(雙嶺)에서 왜적을 만나 싸우다 자결했다. 이때 그의 아들 이덕창은 상주판관(尙州判官)으로 재임하나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전투에 참여하고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했다. 이처럼 이응의 가족은 국란에 목숨을 바친 충신집안으로 이름을 드높였다. 이절과 이덕창은 어떠한 인물인가?

이응과 형제 이희, 이유 삼형제는 퇴계 이황의 제자로서 학문을 좋아하며 성리학을 연구한 뛰어난 학자였다.

당시 쟁쟁한 이황의 제자 중에서도 이응의 깊은 학력을 누구도 따르지 못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당시 경상도관찰사는 이응의 학문이 넓고 깊으며, 행실이 고상하다 하여 벼슬에 추천해 통례원인의(通禮院引儀: 조회(朝會)와 의례(儀禮) 등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종6품의 벼슬에 임명됐다. 그러나 그는 당파 싸움에 싫증을 느껴, 벼슬을 그만두고 안동의 절강 뒤 도수골에서 무릉정(武陵亭)을 짓고, 성리학 연구와 수양에만 전념했다. 이때 동문 수학하던 학봉 김성일, 월천 조목 등과 사귀면서 시국과 정치와 학문을 논하며 산림학파의 길을 걸었다. 사후 경상도 관찰사 이관징이 이응의 학덕을 기리어 송곡리에 사곡사(沙谷祠)라는 사당을 지어주었고, 후손이 그 곁에 무릉정을 옮겨 지어 그가 남긴 덕을 기리고 있다.

그의 아들 이덕창은 서애 류성룡의 문인으로, 선조 때 약관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해 상주판관(尙州判官)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의 공으로 내자시정(內資寺正:궁중의 식품, 피륙, 의식 등의 일을 맡아보던 정라품 당하관의 벼슬)에 제수됐다. 그는 관직에서 물러난 후 선대가 자리하던 옛터에 집을 세우고 안채 대청에 '사고구려(沙皐舊廬:사고의 옛집)'라는 현판을 걸었다. 그는 47세로 생을 마쳤고, 고을 사람들은 충효를 모두 갖춘 뛰어난 인물로 추앙받던 이덕창이 갑자기 죽자 많은 사람들이 애통했다고 전하고 있다.

호명면 사고막골의 야산을 배경으로 이덕창이 지은 집은 현재 경상북도 지정문화재 제71호로 본채와 사당, 대문채 3동이 남향하여 있다. 대문간에서 본채까지의 넓은 마당은 경사져 올라갔고 그 위에 다시 이중으로 축대를 쌓아서 본채를 앉혔으며, 동쪽 담장 밖에 흙담장을 쌓고 사당을 별도로 세웠다.

ㅁ자형의 안채와 서쪽에 위치한 사랑채가 본채를 이룬다. 사랑채는 막돌기단 위에 큰 막돌초석을 놓고 대청 주위에만 둥근기둥을 세웠으며 소박한 모양의 이익공을 구성하였다. 중문간을 들어서면 안채에 이른다. 마당을 향한 안채의 정면 3칸은 대청과 온돌방으로 되어 있으나 원래는 3칸이 전부 대청이었다고 한다. 막돌쌓기한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네모기둥을 세웠으며, 안대청 전면 기둥 위에는 초익공을 베풀었다. 안대청의 뒷벽 널문 문틀에는 중간설주의 흔적이 있으며 삼량가이지만 대공은 다양하면서도 각기 고졸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이익공 맞배지붕 집이다.

약간 변하긴 했으나 이 지역 사대부의 주거 모습을 볼 수 있고, 특히 조선 중기 건축의 목구조 세부 기법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건축물로서 건축사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이상만 기자
이상만 기자 smlee@kyongbuk.com

경북도청, 경북경찰청, 안동, 예천 담당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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