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여년전 정착한 검재 최수지 후존의 세거지

▲ 쌍암고가, 북애종택 전경

중요민속자료 제105호로 지정된 ‘해평 최상학 가옥’은 지금은 없어졌지만 큰 바위 두 개가 집 앞에 있어 쌍암고가로도 불리고 있는데 현재는 최렬(82)씨가 지키고 있다.


집은 400여 년 전 이 고을로 들어와 정착한 입향조 검재 최수지(儉齋 崔水智)의 10대손 진사 최광익이 아들의 살림집으로 조선 정조 3년(1779)에 지었다.

본래는 사당채·안채·안대문채·사랑채·대문채와 그 밖의 부속건물로 구성된 조선 후기 지방 상류가옥이었다고 하나 지금은 그 일부를 잃고 안채·안대문채·사랑채와 사당채만 남았다.

사랑채는 안 대문채 밖에 정남향으로 놓였는데 두리기둥에 팔작지붕을 한 건물로 4칸의 방과 4칸의 대청으로 구성돼 있다. 방과 대청을 가르는 네 분합문에는 각각 팔 모와 십이 모의 불발기창을 쌍으로 내고 빗살무늬로 꾸며져 있다.

대청은 뒷면 두 칸에 턱을 지워 한 단 높은 마루로 꾸미고 들장지를 달아 필요에 따라 여닫을 수 있는 실용성과 풍취를 아울러 고려했다. 대청의 측면 벽도 모두 장지문으로 막아 필요하면 언제든 완전 개방할 수 있도록 했으니, 인공으로 지은 집에 언제든 자연을 끌어들일 수 있는 구조다. 작은 공간 속에 큰 공간을 끌어들이는 지혜의 소산이라 하겠다.

안채는 ㄷ자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으며 동쪽을 향해있으며 안대문채는 一자형으로 안채와 마주해 ㄷ자형의 트인 공간을 가로막았으나 지붕은 서로 연결되지 않았으므로 열린 ㅁ자형을 이루고 있다.

지난 3월 26일 구미시 해평면 문중산(해평 주산)에서 열린 인재 최현 선생 가사문학비 제막식

영남지방 일반적인 민가의 ㅁ자형식은 이런 때 안채와 안대문채의 지붕이 서로 이어지고 그 대문채는 사랑채가 되는 것이 보통이다.

이러한 일반적인 형식과는 달리 이 집에는 사랑채를 안대문채 바깥에 따로 두고 안대문채는 사랑방의 기능이 아닌 곳간의 기능만을 가지도록 돼 있다.

이 집의 특색이자 흔치 않은 예이다. 이 밖에도 민가치고는 꽤 높은 축대라든지 이 지역에서는 드문 규모에 드는 6칸 대청을 지닌 점도 이 집의 별스러움이다.

사당채는 그 치장에 오히려 눈이 쏠린다. 근처에 흔한 돌을 크기대로 벽돌처럼 다듬어 얕지만 가지런하게 쌓은 축대라든가 모양과 크기대로 떠낸 판석을 아귀 맞춰 깐 봉당, 사이사이 진흙을 이겨 넣어 기와 조각을 한 층 한 층 쌓아서 마감한 양 옆의 벽체에서 공을 들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쌍암고택의 길 건너에 ‘북애고택(北厓古宅)’이 있다. 영정조 시대의 실학자 최광익이 정조 12년(1786)에 지은 둘째 아들의 살림집이었으나 나중에 그 형과 집을 바꾸었다고 한다. 쌍암고택의 북쪽 언덕(북애)에 있다 하여 그런 이름이 붙었다.

쌍암고가에서 골목 하나 지난 북쪽에 같은 방향, 같은 모양, 같은 구조로 자리하고 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사당채가 남아 있지 않은 것, 사랑채 분합문 불발기창이 완자살을 매긴 네모라는 점, 안 대문채와 사랑채의 축대에 더 신경을 쓴 일 정도일 것이다.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41호이다.



970726_248862_3800.jpg
쌍암별채

쌍암고택에서 주산방향(마을 뒷산)으로 올라가다 보면 최근에 준공한 것으로 보이는 붉은 흙벽돌로 지은 8채의 집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다.

쌍암별채로 명명된 이 집은 현재 쌍암고가에 살고 있는 최렬(82)씨가 고향을 방문하거나 집 안 큰일에 참석하기 위해 전국에서 모이는 형제 후손들이 잠시라도 편히 기거할 수 있도록 지었다.

쌍암별채를 둘러보면 이 집안 형제들의 우애가 절절히 느껴진다.

서울에서 생활하다가 퇴직한 10남매 중 막내인 최 엽 씨가 현재 거주하면서 집안 큰일을 살피고 있다.



해평 입향조 검재儉齋)공

해평 입향조인 검재공은 경암(敬庵) 허조(許稠)의 문인(門人)으로 세종 29년(1447년) 정묘(丁卯 )식년시(式年試)에서 생원시 1등으로 급제하고, 단종(端宗) 1년(1453년) 계유(癸酉) 식년시(式年試) 정과(丁科)에 급제한 후 입조해 전한 옥당응(典翰 玉堂應敎), 행비안현감(行比安縣監)을 거쳐 홍문관, 예문관 직제학(直提學)을 역임했다.

또한 상서원정(尙瑞院正)으로 있을 때 서장관(書狀官)으로 북경에 갔을 때 명나라 황제가 상사한 문장정종 및 주자서안과 용연중 주자서안은 해평에 전해지고 있으나 용연은 행방을 알 수가 없다.

검재공은 사천에서 태어 나 함평 모씨(咸平牟氏)와의 사이에 장남인 군수공 휘 이식(以湜)을 낳았으며, 비안현감으로 부임 도중에 해평에서 해평 김씨 김영발(金英發)의 손녀인 해평김씨(海平金氏)와 재혼했다.

해평으로 이거(1470년 ~ 1780년 사이)한 후 해평 김 씨와의 사이에 차남 이회(以淮), 3남 이하(以河). 4남 이한(以漢) 등 3남 2녀를 낳았다.



인재 최현 선생

인재공 최현은 1563년 지금의 구미시 해평면 해평리에서 심(深)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뛰어난 문학가이자 훌륭한 저술가로, 산야에 묻혀 인격과 학문만을 추구한 은둔지사가 아니라 현실 참여 속에서 부단한 개혁을 시도한 실천가이기도 한 최현의 주옥같은 가사 작품은 우리 국문사에 빛나는 별들로 평가되고 있다.

그 중 ‘내 타신 가/뉘 타신고/천명인가/시운인가’로 시작되는 용사음은 임진왜란의 참상을 직접적인 소재로 지어진 작품이다.

또 ‘요금을 빗기안아 봉황곡을 타집으니/성성(聲聲)이 청원하여 태공에 드르가니’ 등의 내용이 담긴 명월음은 전란에 지친 겨레의 호흡 속에서도 불굴의 정신과 위국충성의 굳은 결의를 보이고 있으며 전쟁에 대한 증오와 평화에 대한 희망을 노래하고 있다.

최현 선생을 연구한 전 효성카톨릭대학교 문학박사 홍재휴 교수는 “최현의 가사문학은 임란을 배경으로 한 우리나라 최초의 전쟁문학으로 박인로 등의 가사문학에 영향을 준 주옥같은 고발 문학”이라고 평가했다.

가사 문학비 건립을 추진한 최순 추진위원장(최현 선생 15대손, 전 동아대 부총장)은 “우리 사회는 지금 급격한 산업화와 민주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전통적 규범이 와해되고 개인주의적 가치가 팽배해 지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공동체도 급격히 붕괴 되고 있는 실정”이라며 “인재 선생의 문학비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터전에서 삶을 함께하는 우리 모두에게 대를 이어 가면서 공동체적 삶의 가치와 의무의 중요성을 일깨워 줄 수 있을 뿐 아니라 우리 모두를 통합시켜 줄 수 있는 좋은 상징물이 될 것이다”고 말했다.

이러한 인재공의 가사문학을 재조명하기 위해 문중에서는 인재공 문학관 건립 추진 위원회(위원장 공동대표 김기탁 전 상주대 총장, 최맹호 전 동아일보 대표)를 조직하고 주손 최세호씨를 중심으로 오는 10월1일 븍애고택에서 현판식을 개최할 예정이다.

하철민·박용기 기자
김선동 kingofsun@kyongbuk.com

인터넷경북일보 기자입니다.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