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고이지신' 가풍으로 600년 종가의 전통문화 계승

하늘에서 내려다 본 사우당 마을 전경

임진왜란에 구원병으로 왔던 명나라 장수 이여송의 참모이자 천문지리에 능한 풍수가였던 두사충(杜師忠)이 성주 지역을 둘러보고 다섯 곳을 풍수지리상 명당으로 지목한 바 있다. 이 다섯 곳은 수륜면 윤동마을과 초전면 월곡리 홈실, 대가면 칠봉리 사도실, 선남면 오도리 오도마을, 칠곡군 지천면 창평리 웃갓(이곳은 인조 이전까지 성주목의 속현인 팔거현이었다) 등인데, 두사충이 첫 번째로 꼽은 명당인 수륜면 윤동마을에 의성김씨 문절공파(文節公派)의 종가인 사우당 종택이 자리하고 있다.

성주 사우당

종택은 평지에서 마을 뒷산 아래까지 여러 채의 건물이 길게 늘어서 있는 보기 드문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넓은 대지에 남향으로 대문, 사랑채, 전시실과 서고, 안채가 있다. 대문 왼쪽에는 최근 건립한 전통문화체험을 위한 2개 동의 체험가옥이 있다. 안채는 건립 당시에는 남부지역 반가(班家)의 기본 형태인 튼ㅁ자형을 이뤘을 것이나 현재 아래채, 고방채, 중문간채는 소실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돌담을 따라 산책을 할 수 있을 정도의 고즈넉한 마당은 잔디로 장 정돈돼 있다. 마당 구석에는 400년 된 우물이 있고, 장독대와 푸른 소나무가 어울려 고택의 기품을 더해주고 있다. 안채는 ‘ㄷ’자형으로 정면 4칸, 측면 3칸의 박공지붕을 이루고 있으며, 뒤쪽은 사우당(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61호)이 있다. 그 뒤에는 사우당 용마루 높이에 문절공 김용초의 재실인 영모당이 있다.

종택의 이름 사우당은 이곳 윤동마을에 입향한 김관석(金關石)의 호에서 유래했다. 조선 중종조의 학자인 사우당 김관석이 이곳에 터를 잡은 이후로 지금까지 윤동마을은 의성김씨 집성촌이 되었으며, 마을의 정신적 지주이자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문절공 김용초와 사우당 김관석

문절공 김용초(金用超, ?~1406)는 고려 충정왕 때 문과에 급제했으며 성품이 질박(質朴)하고 곧으며 무재(武才)가 있었다고 한다. 1390년(공양왕 2년)에 왜구가 양광도(충청도)를 침탈하자 밀직부사로서 윤사덕, 이방과 등과 함께 도고산(道高山, 예산군과 아산시 사이에 있는 산) 아래에서 왜구 100여 급(級)을 베어 전공을 세웠다. 조선 개국 후 호남병마도절제사(都節制使)를 제수 받고, 가선대부(종2품)에 이르렀으며 개국원종공신에 봉해졌다.

사우당 김관석은 조선 중종조의 학자로 품행이 독실하고 사서오경을 바탕으로 한 도의(道義, 사람으로 마땅히 행해야 할 도덕이나 의리)를 익히고 닦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또한 서당을 세워 많은 제자를 가르쳤으며, ‘독서명문도편(讀書銘聞道篇)’을 비롯한 유교철학과 관련한 적지 않은 저술과 …‘사우당십경운(四友堂十景韻)’을 남겼다. 조정에서 공의 어짊을 듣고 제릉참봉의 벼슬을 내렸으나 ‘부모가 계시는 집을 떠날 수 없다’ 하여 사양하였다. 사후 덕천서원에 제향되었다.

그는 윤동마을에 세거하는 의성 김씨의 정신적 지주였다고 한다. 특히 사군자로 통칭되는 매화, 난, 국화와 더불어 대나무를 벗한다고 하여 스스로 호를 사우당이라고 하고 주변에 많이 심었다고 한다. 선비들이 굳이 사군자를 좋아하는 것은 매화는 이른 봄, 눈이 채 녹기 전 추위를 무릅쓰고 제일 먼저 꽃을 피우고, 난은 깊은 산중에서 은은한 향기를 멀리까지 퍼뜨리며, 국화는 늦가을 찬 서리를 이기고 꽃을 피우고, 대나무는 속이 비웠을 뿐 아니라, 매서운 칼바람이 부는 겨울에도 푸름을 잃지 않는 성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뜻있는 선비들이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지조와 절개를 큰 덕목으로 여겼던 데서 유래한다.


△사라져 가는 종가문화를 지켜나가다

의성김씨 문절공파 종가인 사우당 종택에는 현재 문절공 김용초의 21대 종손인 김기대 씨와 종부 류정숙 씨가 살고 있다. 종손과 종부는 600년 종가를 선비정신과 전통문화를 배울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하며 많은 이들에게 문을 활짝 열어 놓고 있다. 사라져 가는 종가문화를 지켜나가는 것을 사명으로 여기고 종가문화를 널리 알리고 지켜나가기 위해 종택을 활용하여 다도체험과 예절 교육, 민속놀이 등을 직접 행하여 오고 있다.

사우당 종가는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을 가풍으로 수 백 년을 지켜왔다.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통을 지켜야 하는 이유와 도리가 여기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종손과 종부는 자식들과 손자들에 대한 교육의 목표를 여기에 두고 옛것은 지키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교육함으로서 종가문화의 전통을 지켜나가도록 하고 있다.

‘꽃다운 스무 살에 종부가 되어/ 육백년 내려온 종가 집 예법에 따라/ 조상님께 누가될까 이 가문에 폐가 될까/ 숙명처럼 살아온 종부의 길/ 하늘이 내 맘 알고 땅이나 알지/ 이 가슴 태운 속을 그 누가 아리요/ 몸가짐 언행하나 조심하면서/ 꽃처럼 곱던 얼굴 백발이 다 되도록/ 외로워도 말 못하고 괴로워도 참아내며/ 오직 한 길 지켜온 종부의 길/ 하늘이 내 맘 알고 땅이나 알지/ 한만은 그 사연을 그 누가 아리요.’

이 노랫말은 종가문화를 지키기 위해 오랫동안 노력해온 종부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종손이 지어준 ‘종부의 길’이라는 가사이다. 그만큼 사라져 가는 종가문화를 지켜나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길인지, 종가를 지켜온 것에 대한 종손의 감사의 마음이 담겨 있으니 그 어려움이야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도움말=박재관 성주군 학예사

사우당 옆 서원에서 춘계향사를 올리는 모습
사우당에서 집사 분정을 논의하는 후손들의 모습
권오항 기자
권오항 기자 koh@kyongbuk.com

고령, 성주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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