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락씨, 제3회 경북일보 문학대전

이성근 작.
캠핑카는 커다란 차체를 덜컹대며 다섯 시간을 달렸다. 바위와 모래, 잡초의 사막에 흩어진 돌덩이가 바퀴에 채일 때마다 차체는 좌우로 흔들렸고 우리의 몸도 따라 움직였다. 차는 앞차의 타이어가 만들어낸 흔적을 길 삼아 따라갔다. 먼저 이곳을 달려가 차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리의 흔적을 쫓아 이곳을 지나갈 차량이 우리의 존재를 모르는 것처럼 그렇게 길은 입을 다문 채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이쯤에서 쉬기로 합시다. 다들 오뚝이가 되느라 고생하셨죠?”

가이드의 말에 몇몇 사람이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 지어 보였지만 웃음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모두 지쳐 있었다. 캠핑카가 멈추자 사람들은 차에서 내려 용변을 보러 사방으로 흩어졌다. 한동안 말과 양 떼만이 가득한 끝없는 초원이 펼쳐지나 했더니 언젠가부터 사막이었다.

차량에서 멀리 떨어져도 용변 보는 모습을 감춰줄 커다란 나무 한 그루 보이지 않았다. 멀리 커다란 바위가 보였지만 그마저도 캠핑카에서 꽤 많이 떨어져 있었다.

나는 차량에서 조금 떨어진 언덕 아래에 서서 소변을 봤다. 오줌 줄기가 땅에 스며들었다. 등만 돌리면 어디서든 소변을 볼 수 있는 건 남자로 태어난 몇 안 되는 장점 중 하나였다. 캠핑카를 함께 타고 후른베르 초원을 지나 이곳 내몽골 사막으로 들어온 여성들은 차량에서 한참이나 떨어져 몸 가릴 곳을 찾아야 했다.

땀을 흘려온 탓에 소변의 양은 얼마 되지 않았다. 힘없이 떨어지는 오줌 줄기는 짙은 노란색이었다. 사실 요의가 느껴진 건 아니었다. 다음 정차 전에 용변을 미리 봐두라는 가이드의 권유 때문이었다. 몽골로 향하기 한 달 전부터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했다. 의도한 건 아니었다. 단지 식욕이 느껴지지 않았다. 음식은 수명을 유지할 만큼이면 충분하다 믿었다.

“독수리예요. 독수리. 저거 진짜 독수리 맞죠?”

지퍼를 올렸을 때였다. 용변을 보러 수십 미터를 걸어간 두 명의 여성이 캠핑카를 향해 뛰어오며 외쳤다. 여자들이 가리킨 곳엔 점처럼 작게 보이는 서너 마리의 독수리가 공중을 선회하고 있었다. 그곳은 야산이었다. 독수리가 모여든 곳은 거기서 멀지 않았다.

“동물시체가 있나 보군요. 아마 죽은 야생동물일 겁니다.”

가이드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턱에 샤프심처럼 까칠한 수염을 기른 그는 이런 생활에 익숙한 듯했다. 독수리가 모인다면 그곳에 먹이가 있음이 틀림없었다. 용변을 보고 돌아온 사람들은 신기한 듯 수백 미터 앞을 날고 있는 독수리를 쳐다봤다. 초원지대를 지나 사막과 초원의 경계지역으로 들어선지 두 시간 만이었다. 우리의 목적은 후른베르 대초원을 지나 내몽골사막을 거쳐 고비사막에 이르는 것이었다.

“갈 길이 멀지만, 좀 더 쉬다 갈까요. 차가 덜컹거려 다들 지친 표정이군요.”

가이드는 현지인 차량운전수에게 몽골어로 뭐라 말했다. 선글라스 사이로 그의 검은 눈이 움직이는 게 보였다. 운전수도 선글라스를 고쳐 쓰며 답했다. 아마 좀 더 쉬었다 가자는 말과 대답이었을 것이다. 그러는 사이 저 멀리서 또 다른 독수리가 날아드는 게 보였다. 순간 아버지의 시 속에 담긴 독수리가 떠올랐다.

‘눈알 속에 불이 담긴 맹금. 나는 부리로 허공을 쪼던 독수리였는지도 몰라.’1)

아버지가 독수리를 키우기 시작한 건 이십 년 전의 일이다. 아버지는 오래전부터 가슴 속에 독수리를 기르고 있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내게 독수리를 보여 준 적이 있다. 동물원에 갇혀 두 날개를 속박당한 독수리. 굵은 철망 속에 갇힌 커다랗고 짙은 갈색의 독수리는 당장에라도 사냥한 먹이를 찍어 쪼갤 것처럼 끝이 아래로 꺾인 부리를 치켜들고 제왕 같은 늠름한 모습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머리를 덮은 깃털 사이에 숨겨진 커다란 눈동자는 깊고 빛났다. 날카로운 제왕의 눈빛. 하지만 그 눈동자엔 깊은 고독이 서려 있었다. 마치 우리 안에서만 제왕일 수밖에 없는 숙명을 겸허히 받아들이길 강요당한 쇠창살 안의 이반 6세처럼. 언젠가 나는 궁정혁명으로 날 때부터 죄수의 신분으로 평생 감옥에서 살아야 했던 비운의 러시아 황제의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있다. 그는 결국 자신을 구하려던 젊은 중위의 도움으로 감옥을 탈출하다 죽었다. 그럴 때면 나는 목숨을 건 자유의 가치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세상은 아이러니하게도 탈출을 시도한 자의 역사가 아닌 탈출에 성공한 자의 역사를 기억한다. 재미난 일이다.

어쨌든 그것이 그날 아버지와 함께 간 동물원에서 본 독수리에 대한 기억의 전부다. 내가 조금 더 철이 들고 어른이 되어 직장생활에 이골이 날 때쯤 느낀 건, 그날 아버지가 보여주고 싶었던 게 동물원의 독수리는 아니었을 거란 사실이다. 아버지가 정말 보여주고 싶었던 건 야생의 독수리였다. 날개를 활짝 편 채 광야를 날아다니는 독수리. 하지만, 그때의 아버지는 야생의 독수리를 보여줄 수 없었다. 그것은 어쩌면 아버지 역시 단 한 번도 야생의 독수리가 되어보지 못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느 아부지처럼 살지만 마라. 처자식이야 어찌 되든 자기 세계만 빠져 있는 건 짐승도 안 하는 짓이다.”

어머니는 형사를 관둔 후 생계를 책임지지 않는 아버지를 못 견뎌 했다. 이십여 년의 공직 생활이 아버지에게 남긴 건 피폐해진 몸과 마음이었다. 물론 아버지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지만 그때 내가 느낀 건 아버지가 지쳐 버렸다는 것이다.

아버지가 공직을 그만두기 몇 해 전, 후에 6월 항쟁이라 불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민주화 운동이 한창인 시절이었다. 그때 아버지는 그저 하달된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말단 형사에 불과했다. 그해 여름, 아버지는 내가 잠들기 전에 집으로 돌아오는 날이 없었다. 아버지는 매일 자정이 넘어 돌아왔고, 새벽이면 지서로 출근했다. 요의를 느껴 잠에서 깬 새벽녘, 밤늦게 돌아온 아버지가 아침 일찍 제복을 입고 출근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 적이 있다. 그때 아버지의 표정은 깊이 자리 잡은 고뇌의 흔적이 눈물처럼 녹아내려 내 얼굴 위로 떨어질 것만 같았다. 나는 그런 아버지의 표정을 말없이 지켜봐야 했다. 얼마 후, 아버지는 공직을 그만두었다. 그때부터 아버지는 말수가 더욱 줄어들었고, 목적 없는 사람처럼 하루를 보냈다. 아직 젊은 아버지의 등이 휘어져 보였다. 아버지는 얼마 되지 않는 퇴직금으로 중고트럭을 장만했다. 물 만난 물고기처럼 트럭에 물건을 싣고 전국을 떠돌았다. 때론 말린 마늘을 사기위해 의성을, 때론 고추를 사기위해 청양으로 향했다. 겨울이면 아버지는 트럭에 배추를 가득 싣고 다녔다. 그러나 아버지의 트럭장사는 녹록치 않아 보였다. 트럭에 실린 팔다 남은 배추가 시들어 갈수록 엄마는 울상이었다. 자정을 넘긴 늦은 밤이면 동네 어귀에서 아버지의 용달차 소리가 들렸다. 그럴 때면 나는 소리를 지르며 밖으로 나가 아버지의 손을 살폈다. 며칠에 한 번이라도 집에 들어올 때면 아버지의 손엔 과자가 들려 있었다. 종종 아버지의 빈손에 실망하는 모습을 보일 때면 아버지는 신발을 다시 신고 가게로 향했다.

뒤늦게 알았지만, 아버지가 트럭에 싣고 다닌 건 시였다. 아버지는 전국을 떠돌며 시를 썼던 것이다. 강가에 트럭을 세운 채 송사리와 피라미를 잡고 가재를 잡으며 시를 썼고, 저녁이면 그것으로 끼니를 때웠다. 아버지의 트럭에는 누렇게 뜬 습작노트와 볼펜이 실려 있었다. 그것으로 아버지는 자신의 시를 기록했다. 그런 생활이 계속되자 집에 생활비를 제대로 들여보내지 않은 건 두말할 것도 없었다. 자연스레 엄마의 눈에 비친 아버지는 무능하고 대책 없는 양반이었다.

어쨌든 처음으로 나를 동물원에 데려간 그날 이후, 아버지는 가족과 떨어져 혼자 광야로 나갔다. 명백한 사실은 아버지가 광야로 나갔다는 것이다.

누군가 카메라를 메고 허공을 맴도는 독수리 떼가 있는 둔덕으로 걸어 올라가고 있는 게 보였다. 아마추어 사진작가라고 자신을 밝힌 최광수였다. 다부진 몸과 큰 키에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여성 일행에게 치근덕거리던 그였다.

“이거 잘하면 작품 하나 나오겠는데?”

이젠 입버릇처럼 하던 그의 말에 익숙해진지 오래다. 여행 내내 그는 카메라에서 손을 놓지 않았다. 이곳에 오는 동안 그는 끊임없이 작품을 갈구했다. 장춘과 심양을 지나는 동안 끊임없이 들려오던 카메라 셔터 소리가 때론 잠결에도 생각날 지경이었다. 그는 차창 밖을 보며 계속 셔터를 눌러댔다.

“난 말이죠. 피사체를 사진 안에 가두고 싶지는 않아요. 단지 내가 피사체 안에 갇힐 뿐이죠.”

그의 말은 어려웠다. 피사체 안에 자신을 가두다니.

“내가 찍는 피사체의 모습이 전부라고 믿지 않아요. 그 순간만을 포착해서 ‘이것은 이것이다.’라는 단순도식으로 정의하고 싶지 않다는 말이에요. 난 한 장의 사진에서 사물의 모든 걸 담고 싶어요.”

그는 그런 식의 대화가 멋지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가 멋을 부리려고 해대는 소리라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그 말이 내내 유치하게 들린 것만은 아니었다. 어쨌든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말을 한다고 타인의 말이 틀린 건 아닐 테니. 따지고 보면 사진작가인 그에겐 나와는 또 다른 어떤 세계가 있을 것이다.

“형씨는 뭐 하는 분이죠? 아, 초면에 이렇게 물어도 되나요? 나보다 두 살 많다기에.”

혼자 내몽골 사막을 여행하는 내게 최광수는 묘한 관심을 보였다. 혼자 와서 넉살 좋게 떠들어 대던 자신과 달리 말없이 차창만을 바라보던 내 존재가 유난히 활동적인 그에게 부담스럽게 다가왔을지도 모른다. 그의 관심에는 경계와 호기심이 혼재할 것이 분명했다.

“예전엔 컴퓨터 게임을 만드는 회사를 다녔는데 지금은 그냥 쉬고 있습니다. 가끔 글을 끼적이기도 하고.”

나는 대수롭지 않은 듯 대꾸했다.

“컴퓨터 게임이요? 우와! 저도 어릴 땐 프로게이머가 꿈이었죠. 지금은 여행칼럼니스트 겸 아마추어 사진작갑니다. 하하, 말이 그렇지 거의 백수지만요.”

내 말에 그는 그렇게 대꾸했다. 나대기를 좋아하지만 그는 사심 없이 사람들과 친해지기를 좋아하는 사람 같았다. 그래서인지 그가 싫지는 않았다. 어쨌든 북경공항에서 합류해 몇 번이나 차를 갈아타고 이곳에 오는 며칠간 나는 최광수가 보여준 천진난만한 모습에 조금씩 경계를 늦추고 있었다. 그는 솔직한 사람이었다. 적어도 자신을 포장한다는 느낌은 없었다.

언젠가 일행이 함께 맥주를 마시는 자리에서 그가 말했다.

“형은 말이죠. 어딘가 그늘이 있는 사람 같아요.”

나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내게 드리워진 그 그늘의 정체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이 여행은 그것의 정체와 마주하는 여행이었는지도 모른다.

“형의 얼굴을 찍고 싶어요. 얼굴을 보면 마음이 보인다죠? 마음을 사진에 담고 싶은데.”

이틀 전 그가 내게 말했다. 나는 말없이 캔 맥주를 땄다.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거품이 바닥에 떨어졌다. 최광수가 말을 이었다.

“난 말이죠. 인물사진을 찍기 전 가능한 한 사진에 담길 인물과 많은 시간을 보내요. 함께 호흡하고 숨쉬다보면 그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감이 잡히죠.”

그가 말했다.

“그리고 사진을 찍은 후, 사진기에 찍힌 사람의 표정을 오랫동안 바라봐요. 그러면 대부분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이 보인죠.”

그의 말에 나는 피식 웃었다.

“웃죠? 그럴 줄 알았어요. 어쨌든 난 형의 그 표정을 사진에 담고 싶어요.”

그렇게 말하고 그도 맥주를 따 잔에 부었다. 몽골의 밤은 기온이 급격히 떨어졌다. 사막의 바람을 타고 저 멀리서 늑대 우는 소리가 들렸다. 멀리 나가 있던 여자들이 옷깃을 여미며 모닥불 가까이 몰려들었다. 어쨌든 다음 날부터 나는 최광수가 들이미는 사진기를 애써 피하지도 않았다.

선회하는 독수리는 캠핑카 가까이 다가왔다가 멀어지길 반복하고 있다.

최광수가 카메라를 들고 독수리를 향해 가자 출판사에서 연수차 왔다는 여자 두 명과 배낭여행을 온 두 명의 남녀 대학생까지 모두 카메라를 들고 따라갔다. 가이드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오히려 너무 가까이 가지 말라고 주의를 시켰다. 혼자 남은 내게 가이드는 왜 사람들과 같이 가지 않는지 물었다. 그 말에 ‘그냥’이라 답했다.

사실 나는 그 흔한 DSLR 하나 준비하지 않았다. 구형 디지털카메라가 가방 깊은 곳에 담겨 있었지만 거의 꺼내지 않았다. 증거를 남겨야 하는 의무감에 사로잡힌 듯 뭔가를 찍어대는 것이 싫었다. 최광수의 말을 빌리자면 차라리 마음속에 피사체를 남겨두고 싶었던 것이다. 기억의 한계가 있겠지만, 정말 기억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어떻게든 가슴 속에 남아 그것이 필요한 순간 떠오를 거라 믿었다. 만약 잊혀 진다면 그만큼 내 마음을 사로잡지 못한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 탓이었다.

다들 사진을 찍어 대는 분위기 탓인지 나도 가방에서 디지털카메라를 꺼냈다. 멀리 날아가는 독수리를 렌즈로 끌어당겨 찍었다. 저가의 디지털카메라에 찍힌 피사체는 흔들려 있었다.

“쉬면서 여행이나 좀 갔다 와.”

그날 부장이 말했다.

“퇴직금은 경리과에서 처리해 줄 거야. 퇴사사유는 부서 해체로 해놓을 테니 실업급여 수급에는 문제없을 거야. 다른데 면접 볼 때도 그렇고.”

그는 굳이 구질구질하게 챙기지 않도록 모든 걸 준비해 준다고 했다. 어차피 부서 해체는 기정사실이었고 윗선에서 결정 난 일이라 나로서는 그걸 막을 방법이 없었다. 친구들이 죄다 군대에 간 동안 홀로 학교 수업과 병행하며 8년간 재직해온 회사였다. 아버지처럼 되지 않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해온 나는 졸업학기가 되자 학과 내의 누구보다 먼저 취업전선에 뛰어들었다. 대학에서 전공한 소프트웨어 개발이 천직이라 믿었다. 이미 시작한 일은 뒤도 돌아보지 말아야 한다고 다짐했다. 입사 후, 아침 일찍 출근해 정수기 물을 갈고 컵을 씻었다. 누가 시킨 건 아니었지만 그래야 할 것만 같았다. 처음 접하는 사회였고 위계질서는 중요했다. 퇴근 후엔 심심찮게 술과 술이 오갔고 술자리 정치는 당연한 관례라는 선배들의 말이 기정사실처럼 들렸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흘러 나는 재작년 초 과장으로 승진했다. 30살의 최연소 과장이었다.

“자네 팀이 해체되는 걸 막을 수는 없었어. 회사차원에서 최대한 합리적으로 판단한 거야.”

회사가 재정 위기로 다른 회사에 합병되자 인수 회사 측에선 인원 감축을 요구했다. 불필요한 팀을 축소해야 하는 상황에서, 하필 내가 속한 팀이 유력한 후보가 되었다. 최근 몇 년간 사내 정치에 관심이 없었던 건 사실이었다. 시장의 동향이니 신기술 습득이니 따위가 더 이상 귀에 들어오지 않아진 지 오래였다. 몇 해 전부터 내가 글 쓰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는 사실이 공공연한 기정사실이 된 후 업무와 관계없이 나의 실적 평가는 최하위에 랭크되었다. 회사 입장에선 업무 밖의 활동이 곱게 보이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기왕 인원을 감축한다면 회사 수익과 직접적인 개연성이 없는 팀이 해체되는 게 당연했다. 씁쓸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그렇게 생각하니 오히려 홀가분했다.

“피는 못 속인다더니.”

어머니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글을 쓰니 어쩌니 하면서도 착실하게 직장생활을 해온 것을 인정하는 눈치였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내가 글쟁이가 될까 봐 염려하는 눈치였다. 서른 넘게 결혼할 생각이 없는 나를 보며 불안해하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글을 쓰고 싶었다. 세상과 소통하는 길은 그것밖에 없다고 여겼다. 퇴근 후면 으레 벌어지는 술자리에서 주식을 해서 얼마를 벌었는지 현재 시장의 동향이 어떤지 따위를 논하는 일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그저 먹고사는 일에 얽매여 사는 대로 살아가는 인생이 되고 싶지 않았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세상에 익숙해질수록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어머니가 그만 아버지를 용서하길 바랐다.

“이만 하면 살 만하잖아요. 돈 버는 게 뭐가 그리 중요해요. 그까짓 돈 좀 안 벌었다고 아버지가 죄인이 되나요?”

“그래 이만하면 살만하다. 네 아버지가 ‘시’에 미쳐 가정을 돌보지 않아도 이만하게 살기 위해 애미는 뼈 빠지게 일해 왔다. 너는 그저 아무 부족함 없이 살았으니 쉽게 말하는구나.”

“나도 아버지가 잘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하지만, 이젠 용서할 때도 됐잖아요.”

아버지가 집에 소홀한지도 십 년이 넘었다. 어머니는 여전히 아버지에 대한 앙금이 남아 있었다. 아버지가 집을 소홀히 한 후 어머니는 주산 교습소를 차렸다. 고등학교 때 익힌 주산실력은 근근이 아버지의 부재를 채웠다. 다행히 교습소는 잘 됐고 몇 년 후에는 더 큰 곳으로 자리를 옮겨 미술과 피아노까지 가르치는 종합학원으로 바뀌었다. 주산은 더 이상 가르치지 않았다. 세상은 주판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컴퓨터로 채워나갔다. 아이러니하게 나는 대학에서 컴퓨터를 전공했다. 세상은 기묘한 방식으로 자리를 이어간다는 것과 그런 이유로 세상은 매번 결핍을 최소화시킨다는 걸 깨닫게 된 것도 그때쯤이었다.

“캠핑카가 있다는 걸 알고 이쪽으로 오지는 않아요. 야생 독수리도 문명의 이기를 무서워할 줄 알죠.”

가이드가 말했다. 그의 말대로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한 독수리는 차량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곳만을 오가며 경계하는 눈치였다.

“독수리는 눈이 좋다더니 차를 구별할 줄 아나 보죠?”

“그럼요. 독수리고 사람이고 간에 서로 마주치고 부대끼다 보면 경계도 하고 조심할 줄도 아는 거죠. 독수리가 눈이 좋다지만 이곳 사막 사람들도 눈이 좋아요. 사막이라 멀리 보기 때문이죠.”

사막의 사람이라면 내몽고자치구에 몽골 파오라는 이동식 천막집을 짓고 사는 소수민족을 말다. 우리가 오늘 묵을 곳도 그런 천막집이었다.

현지인 운전수가 아이스박스에서 물을 꺼내왔다. 장춘에서부터 8인승 캠핑카를 이틀째 운전해온 크지 않은 키에 드센 기질이 드러나 보이는 전형적인 몽골 인이다. 가이드는 익숙한 몽골어로 한참 동안 그와 이야기를 나눴다. 운전수는 독수리를 가리키며 뭐라 말하는 듯했다. 그와 이야기를 마친 가이드가 내게 말했다.

“내몽골의 독수리는 길게는 70년 이상 사는 동물이랍니다.”

“그래요? 뜻밖이군요.”

나는 의외의 말에 놀라 반문했다. 흔히 덩치가 큰 동물이 오래 산다고는 들었지만, 독수리가 그렇게 오래 사는 줄은 몰랐다.

“환골탈태라는 말 들어보셨죠?”

나는 뜻밖에 그의 입에서 나온 환골탈태라는 말에 놀라 그를 쳐다봤다. 뼈를 바꾸듯 몰라보게 변한다는 의미의 그 사자성어를 나는 누구보다 잘 안다. 주나라 영왕의 아들 왕자교가 신선이 된 것에서 유래된 말이다. 몽골로 떠나기 전 찾아간 아버지의 사무실 한 귀퉁이에서 나는 그 글자를 본 적일이 문득 떠올랐다. 그 일이 갑자기 마음에 한곳에서 다시 통증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독수리라는 동물은 원래는 40년 이상 살기가 어려워요.

그때 가이드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도 조류치고 40년이면 대단한 수명이네요.”

가이드의 말에 캠핑카를 떠나지 않은 여자 중 하나가 말했다.

“조류라곤 하지만, 맹금류는 맹수나 다름없어요.”

가이드는 핫팬츠를 입은 여자의 다리를 힐끔 대며 말했다. 30대에 막 들어선 듯한 여자의 다리는 아직 탄력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요. 하려던 말이 뭐였죠?”

나는 가이드의 말을 재촉했다.

“아 글쎄 이놈이 40세 정도가 되면 부리가 가슴 쪽으로 휘어져 목을 파고들어요. 발톱도 안으로 굽어져 먹이를 잡기조차 어려워지죠.”

“그렇군요. 짐승도 자연스러운 노화를 거치는군요.”

나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따지고 보면 늙는 건 인간만이 아니다. 그가 말을 이었다. 여자도 흥미로운지 가이드의 입만 보고 있었다. 그걸 눈치챈 가이드는 신이 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이때 독수리는 한 가지 결단을 하게 돼요. 죽느냐, 사느냐. 만약 살기를 결심했다면 독수리는 절벽 속 동굴에 들어가 자신의 부리를 바위에 쳐 깨뜨립니다. 새로운 부리가 날 때까지 기다리는 거죠.”

부리를 깨뜨린다는 말에 여자가 이마를 찌푸렸다.

“새로운 부리가 나면 그걸로 다시 발톱과 깃털을 뽑습니다. 목숨과 바꾸는 고통의 순간이죠. 이렇게 독수리는 발톱과 깃털이 자라 새로운 몸으로 탈바꿈되기까지 1년이라는 시간을 고통 속에서 기다립니다. 그리고 그렇게 이어간 생명으로 70년 가까이 산다는군요.”

“그것이 독수리의 환골탈태인가요?”

내가 물었다.

“그렇죠. 독수리에겐 이 과정이 바로 환골탈태인 거죠.”

가이드는 독수리가 몰려든 쪽을 바라보며 팔짱을 끼고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와 나는 캠핑카에 기대 현지인 운전수가 꺼내온 물을 마시던 중이었다.

“독수리에 대해 잘 아시는군요.”

나는 감탄하듯 물었다.

“하핫, 그냥 몽골에 관한 책에서 읽은 걸 말하는 겁니다. 가이드가 되려면 알아야 하니까요. 어쨌든 사막에서 야생 독수리를 보는 건 어렵지 않아요. 여긴 독수리 말고도 홀란이라는 야생나귀나 타히라는 야생말도 종종 만나게 되죠. 그나마 아직 초원에 멀리 떨어지지 않은 지역이라 야생독수리가 보이는 겁니다. 고비 사막으로 들어서게 되면 말 그대로 모래뿐인 황량한 사막이니까요.”

“그렇군요.”

나는 짧게 답했다. 동굴 속에 은둔해 극한의 고통과 맞바꾼 생명이라. 손톱과 발톱이 뽑혀 나가고 뼈가 꺾이는 고통을 떠올려본다. 피를 토하고 토사물을 모조리 게워낸다. 온몸의 구멍에서 피가 흐른다. 피똥으로 흥건한 바닥에 후두둑 떨어지는 배설물. 그 고통이 지난 후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된다면 나는 고통을 이겨 낼 수 있을까. 생각만으로도 독수리의 고통이 내게도 전이되는 듯했다. 순간 생수에 담긴 물이 피처럼 느껴졌다. 멀리 황사를 머금은 모래바람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문득 그날이 떠올랐다.

“성호, 성호 씨.”

누군가 귓가에서 나를 불렀다. 나는 간신히 눈을 떴다. 의료기구가 발산한 격렬한 빛이 눈을 비집고 들어왔다. 뭔가 말을 하려 했으나 입에선 신음만 흘러나왔다.

“됐어. 의식이 돌아왔어. 회복실로 옮겨.”

의료진의 두런거림이 들려왔다. 나는 다시 잠들었다. 어쩌면 의식을 잃은 건지도 몰랐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몸에 온갖 의료 기구를 감은 채 입에 산소 호흡기를 달고 있었다. 물 먹인 솜을 온몸에 감아 놓은 듯 몸이 무거웠다. 몸이 아프다. 어디가 어떻게 아프다고 할 수 없는 아픔이 엄습했다. 나지막한 신음에 의식이 돌아온 걸 확인한 간호사는 호흡기를 제거해 주었다. 회복실 유리문 밖에 멍하게 서 있던 어머니가 눈물을 훔치는 게 보였다. 폐와 연결된 긴 관을 넣은 옆구리로 피 섞인 고름이 빠져나갔다. 갈비뼈와 갈비뼈 사이를 벌려 폐까지 긴 관을 밀어 넣은 상태였다. 몸에서 빠져나간 고름은 플라스틱 기구 속으로 스며들었다. 벌어진 틈 사이로 내 몸은 고통을 내지르고 있었다.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날 흉부외과 과장 의사는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여기 오른쪽 폐를 완전히 들어내는 대수술이 될 거야. 네 나이로선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겠지만 어차피 한쪽 폐가 사라지면 나머지 폐가 팽창해서 다른 한쪽의 역할을 감당하게 마련이지. 수술 후에도 정상에 가까운 생활을 하는 데는 별문제 없을 거야.”

그는 내 오른쪽 가슴 위로 원을 그리며 수술할 부위를 입체적으로 설명했다. 정상에 가까운, 이라는 그의 말이 한동안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이틀 후, 나는 폐가 절제된 채 회복실에 누웠다. 간신히 손을 들어 오른쪽 가슴을 짚었다. 숨을 쉴 때마다 위아래로 오르내리던 가슴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한쪽이 사라지면 나머지 한쪽이 그 역할을 감당하기 마련이지.’

의사의 말을 떠올려본다. 지금 나는 왼쪽 가슴만으로 숨을 쉬고 있는가. 한쪽 폐의 기능을 잃고 다른 한쪽만으로 살기 위해 버둥거리고 있는가. 따위의 생각이 뇌리를 혼란스럽게 했다. 생에 대한 갈망이 크지 않았던 게 다행이었다. 그것이 오히려 나를 살게 했다. 어쨌든 그날은 나의 두 번째 생일이 되었다. 살아 있는 게 다행이라고 느낀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내일 오후쯤이면 고비 사막으로 들어갈 수 있을 거예요. 이제부터 시작인 거죠.”

황사로 자욱한 차창 앞을 가리키며 가이드가 말했다. 멀리 하늘 위로 황색 구름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내일 오후쯤이면 우리는 고비 사막으로 들어간다. 그곳은 이 여행의 최종 목적지다. 이곳에 오기 전, 내셔널 지오그래픽잡지의 한 페이지에서 고비 사막을 찍은 사진을 봤다. 끝없는 모래의 사막. 사막의 바람이 만든 모래 물결과 그림자. 그곳에 드문드문 피어 있는 이름 모를 잡초들. 하나의 피사체가 되어버린 사막은 거대한 자궁 속처럼 느껴졌다. 사막 곳곳의 둔덕이 주는 영속성이 나를 그곳으로 끌어당겼다. 그 속으로 나를 던져 넣고 싶었다. 그곳이라면 막 수정된 태아처럼 웅크릴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결국 그 바람이 나를 고비 사막으로 향하게 했는지도 모른다. 우연이었을까. 내몽골 사막으로 여행을 결심하던 날 부장으로부터 부서 해체를 통보받았다. 여행을 갔다 오라는 부장의 말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나는 이곳 내몽골 사막으로 여행을 준비하고 있었다. 나는 ‘나’라는 껍데기를 탈피할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이드의 말을 빌리자면 환골탈태하는 독수리처럼, 부리와 손톱과 깃털을 갈고 새롭게 태어나는 야생 독수리처럼 말이다. 그때 문득 떠올린 건, 아버지의 시 속에 있던 독수리였다. 눈 속에 불이 담긴 맹금. 그 맹금을 남기고 자신의 삶을 찾아간 아버지.

“시인은 무슨 얼어 죽을 시인이냐. 어디 가서 시인이랍시고 얼굴 내밀기도 힘든 사람을 시인이라 불러주면 아무나 시인되겠다.”

생활인이었던 어머니에게 아버지의 시성은 용납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몽골로 떠나기 전 아버지를 찾아 고향에 내려간 일을 떠올렸다. 아버지는 시 문학회라는 명패가 걸린 허름한 사무실에 있었다. 지역명을 딴 이름이 붙어져 있었지만, 동호회 수준의 시인 단체였다. 아버지에게 한동안 여행을 갈 거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냥 일이 있어 내려왔을 뿐이라고 했다. 서가에 가득 꽂힌 오래된 책들이 협회 사무실의 운치를 더해주었다. 묵은 책 냄새가 사무실 곳곳에 짙게 배어 있었다. 아버지는 잘 지냈느냐는 말을 건네며 티백과 커피믹스가 든 상자를 뒤적였다.

“제가 할게요.”

“됐다. 앉아 있어라.”

엉거주춤 일어서다 말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아버지가 종이컵을 내밀었다. 미지근한 정수기 물이 담긴 종이컵엔 녹차 티백이 들어 있었다. 나는 사무실을 눈으로 훑었다. 그때 내 눈에 들어온 건 액자에 담긴 환골탈태(換骨奪胎)라 적힌 글자였다. 벽에는 그 외에도 동인회 사무실이 소개된 몇 개의 스크랩기사가 벽에 붙여져 있었다. 벽지가 떨어져 나간 부분을 가려 놓은 것이었다. 아버지는 서재의 책을 뒤적였다. 나는 소파에 앉아 아버지가 건넨 종이컵을 든 채 가만히 있었다. 어색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아버지와의 벽은 좀처럼 무너지지 않았다.

오랫동안 나는 아버지가 자신을 위해 가족을 저버린 대책 없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사춘기의 그 미묘한 배신의 감정은 이십여 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차라리 드라마에서처럼 아버지가 바람을 피우거나 사업이 망해 도망 다니는 것이라면 차라리 나았을 거란 생각도 들었다. 흐트러진 마음이 애꿎은 종이컵만 구기고 있었다. 그때 탁자 한 귀퉁이에 놓인 시집이 눈에 들어왔다. 아버지가 던져놓은 ‘독수리의 시간’이란 시집이었다. 시집 표지에는 아버지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나는 시집을 집어 들었다.

“민망한 시집이다. 필요하면 가져가라.”

아버지의 말에 시집을 펼쳐 들었다. 초판인쇄일이 93년 8월이었다. 아버지의 첫 번째 시집인 듯했다. 나는 시집을 가방에 집어넣었다. 내게 필요한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가져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의 시가 궁금했다. 시집을 가방에 넣자 또다시 침묵이 흘렀다. 아버지께 묻고 싶었다. ‘시와 함께해서 행복하셨나요?’라고. 그렇게 묻는다면 아버지는 아마 아무 대답도 하지 않겠지. 그렇게 잠깐의 침묵이 흐를 것이고 나는 다시 말을 잇겠지. ‘나도 글을 쓰고 싶어요. 아버지.’라고. 나는 머릿속으로 무수한 상황을 떠올렸다. 하지만, 결국 아버지와의 화해를 위한 아무런 행동조차 하지 않았다. 단지 주섬주섬 자리를 털고 일어났을 뿐이다.

“앉아봐라.”

그때 아버지의 목소리가 내 귀에 들려왔다. 낮으면서도 힘이 실린 목소리였다. 처음이었다. 집을 나간 후 한 번도 강한 어조로 내게 말하지 않던 아버지였다.

잠깐의 시간이 흘렀다. 아버지는 손가락으로 깍지 낀 채 무언가를 곱씹는 표정이었다. 아버지의 얼굴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오랜만에 만난 아버지의 볼과 이마엔 주름이 잡혀 있었고 턱에는 반백의 수염이 듬성듬성 자라나 있었다. 아버지의 표정에 어떤 결심이 섰다고 느낄 때쯤 결연하게 닫혀 있던 입술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람을 죽였다. 과잉진압이었지.”

순간 나는 석고상처럼 굳어버렸다. 사람을 죽이다니. 무슨 말인가.

“이미 진압봉과 방패에 수차례 머리를 맞고 잡혀온 시위대 학생이었다. 가차 없이 진압하라는 명령이 하달된 지 불과 세 시간 후였다.”

아버지는 이십여 년 전의 그 일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 얼빠진 얼굴로 방문을 열고 들어온 아버지의 모습이 봉인된 기억 저편에서 꿈틀대며 기어 나오고 있었다. 매일 대학가에서 터진 최루탄 연기가 민가까지 새어 들어오던 날이었다. 멀리서 최루탄 냄새가 나면 나는 재빨리 방으로 들어가 이불을 덮어썼다. 최루탄 냄새가 너무나 싫었다. 종종 동네 아이들은 데모를 구경하러 가자며 큰길로 나갔다. 큰길에 자리 잡은 대학가에는 연일 학생들이 알 수 없는 말을 외치며 거리를 뛰어다녔다. ‘호헌철폐 독재타도’ 그들이 외치는 호헌이 뭔지 나는 의미를 알 수 없었지만 나는 아이들과 함께 그 구호를 함께 외치곤 했다. 그날 내가 기억하는 건 거리 곳곳에 떨어진 전단과 깨진 유리병, 손수건으로 입을 가리거나 얼굴을 두른 사람들. 커다란 방패와 곤봉을 든 진압대의 모습이다.

“진압 명령을 전달한 건 나였다. 나 때문만은 아니었겠지만, 병원으로 옮기는 도중 출혈이 심했던 그 학생이 죽었을 때, 나는 그를 죽인 진압봉이 내 손에 들린 것처럼 느꼈다.”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그 해의 일들에 대해 알게 된 건 도서관에 틀어박힌 것이 삶 일부가 된 스무 한 살, 여름방학 때였다. 그때 나는 세상이 말하는 진실이란 항상 교과서 밖에서만 존재한다고 믿었다. ‘탁 치니 억하고 죽더라.’라는 정부의 말이 하나의 울분이 되어 사람들의 입에서 오르내리던 날들을 기억한다. 포장마차에서 밤새 흘러나오던 노랫가락이 단지 술 취한 사람의 주정으로만 들리지 않았다. 뭐가 뭔지는 알 수 없으나 세상은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것만은 명백했다. 사람들이 무언가를 위해 싸우고 있다는 걸 유년의 기억 속에서도 나는 눈치채고 있었다. 그 기억 속에서 아버지의 무기력함만이 내게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탁 치니 억, 탁 치니 억.’ 그러니까, 그 탁 치던 진압봉은 아버지의 손에도 들려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

나는 뭐라 더 말할 수 없었다.

“언젠가는 말하고 싶었다. 변명 같은 소리겠지만, 여하간 그만 가봐라.”

창밖으로 해가 지고 있었다. 지는 해가 발산한 빛이 아버지의 눈 속으로 스며들어 붉은 공을 만들었다. 아버지도 그날 이후 속죄의 마음으로 환골탈태하는 독수리의 시간을 견뎌내고 있었던 걸까. 눈 속에 불이 담긴 맹금. 아버지의 눈 속에 들어와 박힌 그것을 나는 이제야 조금이나마 느끼고 있는 걸까.

카메라를 든 채 최광수는 멀리서 뛰어오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 비친 만족감이 그에게 찍혀버린 독수리 피사체를 떠올리게 하였다.

“흠 만족스러운 작품이 나오겠는데요. 무서워서 더 가까이 다가가지 못한 게 조금 아쉽긴 하지만.”

그러면서 그는 자신이 찍은 사진을 자랑스럽게 보여줬다. 최대한 렌즈를 당겨 확대한 사진 속엔 날개를 접은 한 마리의 독수리가 지상에 내려앉아 있었다. 그 옆으로 공중을 향해 다리를 벌리고 누운 짐승의 사체가 보였다. 독수리는 먹이를 향해 바짝 다가섰다. 사진 속 고독한 맹금의 눈빛이 나를 끌어당겼다. 스스로 피사체에 갇힌다는 최광수의 말이 생각났다. 그 말대로 최광수는 독수리의 눈 속에 갇혀 있었던 걸까. 마치 자신의 독수리 속에 갇혀 버린 내 아버지처럼. 문득 아버지가 던져준 ‘독수리의 시간’이 배낭 속에서 꿈틀대고 있음을 느꼈다. 우리에 갇힌 독수리는 이제 이곳 내몽골 사막의 창공 위로 날아오르려는 걸까. 어쩌면 그 바람들이 저 독수리들을 부른 걸까.

“자 이제 시간이 없어요. 두어 시간만 지나면 해가 집니다.”

가이드가 외쳤다. 흩어진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다들 이 낯선 이벤트에 피로가 조금 풀린 모양이었다.

우리는 땅거미가 지기 전까지 몽골 파오가 쳐진 베이스캠프에 도착해야 했다. 초원과 사막이 혼재한 이곳의 밤은 춥다. 더구나 내몽골 날씨는 한국보다 일 개월 가량 늦다. 해가 지면 삼월의 쌀쌀한 날씨가 엄습할 것이다. 게다가 도중에 황사를 만날 수도 있다.

캠핑카는 덜컹대며 초원을 질주했다. 다시 오뚝이였다. 가도 가도 끝없는 바위 사막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자신들을 커플이라 소개한 대학생 둘이 손을 꼭 잡은 채 독수리가 있던 자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명의 여자는 노트북을 꺼내 뭔가를 기록했다. 최광수는 한참 동안 카메라를 들여다봤고 나는 오랫동안 차창 밖을 응시했다. 창밖으로 서서히 해가 지고 있었다. 붉게 물든 태양 사이로 독수리가 날아가는 게 보였다. 아마 이 초원지대가 끝날 때까지 독수리를 보게 될지도 모른다. 최광수는 차창을 열고 독수리를 향해 쉬지 않고 셔터를 눌러댔다.

몽골을 선택한 건 사막에 나를 묻어두고 오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곳에 온 또 다른 이유가 생겨난 듯했다. 그것은 독수리였다. 태양을 등지고 날아가는 저 독수리는 나를 기다린 걸까. 물론 그럴 리가 없다. 하지만,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나는 아버지의 시에 담긴 맹금에서 아버지를 봤다. 그 맹금이 나를 이곳으로 가라 했을지도 모른다. 언젠가 아버지가 말한 그 독수리가 이곳에 있다고, 가서 만나라고.

아버지는 왜 자신을 독수리라고 했을까. 아버지의 독수리는 가이드가 말한 대로 환골탈태 후 다시 태어난 것이었을까.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학생을 보며 아버지가 느꼈던 건 생명에의 연민이었을지도 모른다. 하루하루를 견디고 보내야 하는 생존이 아닌 생명. 하나의 생명으로써 죽어버린 그에게서 아버지가 느낀 건 절망만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그때 결심했을 것이다. 야생의 매처럼 살고 싶다고. 불을 간직한 채 존재로써의 의미를 가지고 살고 싶다고. 형사로서의 삶은 아마 아버지가 바라던 그 야생 독수리의 삶과는 거리가 멀었겠지. 형사가 되려 했을 때 아버지의 기억을 짓누르는 그런 일들을 예측하셨던 걸까. 아버지는 흔들렸을 것이다. 이 시궁창 같은 세상에선 진정 옳은 것은 무엇인가에 대해.

“이봐요. 광수 씨. 그 카메라에 찍힌 방금 날아간 독수리의 눈을 볼 수 있을까요? 좀 무린가?”

왜였는지 그 순간 태양을 머금은 독수리의 눈이 보고 싶었다. 나의 말에 피곤한 표정으로 카메라를 멘 채 쓰러져 있던 그가 대답했다.

“독수리의 눈이요? 잠깐만요.”

최광수는 석양 사이로 날아가는 독수리의 옆모습 사진을 확대해 보여주었다.

“여기요.”

그가 카메라를 건넸다. 최광수가 보여준 화면에는 태양이 눈알에 반사된 붉은 눈을 가진, 눈알 속에 불이 담긴 맹금이 들어 있었다.

나는 최광수에게 카메라를 돌려줬다. 그리고 배낭 속에서 가지고 온 디지털카메라를 꺼내 사막 저편으로 사라지기 시작한 독수리를 찍기 시작했다. 셔터를 누를 때마다 독수리는 흔들렸다. 나는 끊임없이 셔터를 눌렀다. 카메라 속으로 무수히 많은, 흔들린 독수리들이 들어왔다. 머잖아 독수리는 하나의 점이 되어 태양을 향해 날아갈 것이다. 열린 차창으로 사막의 바람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침몰하는 태양 아래로 대지가 저녁을 맞이하는 게 보였다. 땅거미가 지기 시작한 바위 사막은 한낮의 열기를 식혔고 캠핑카는 덜컹대며 사막 한가운데를 질주했다. 내일쯤 나는 고비 사막에 도착해 있을 것이다.

※1)문정희, ‘독수리의 시’의 일부

■당선소감



김경락 씨= 국민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2011 전남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
독수리가 있다.
난다.
날개를 쫙 펼친 채 광야를,
때론 그저 쇠창살에 갇혀
웅크리기도 하고
가끔은 창공에서 야생동물을 향해 강하하지
그러다 지겨워지면 다시 우리 안에 들어가
사육사가 던져준 생닭을 쪼기도 해
내 멋대로지만
어쨌든 독수리다.
그저 그뿐이다.

부족한 작품을 선택해주신 심사위원과 경북일보에 감사합니다.
덕분에 다시 글을 써내려갈 용기를 얻었습니다.
언제나 문학적 동지가 되어주는 ‘종각역 글벗들’과 기쁨을 함께 하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우리 딸 수아 사랑해. 너도 독수리야. 어쨌든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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