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용섭 삼국유사사업본부장

삼한에 관한 기술 다음에 삼국유사는 다시 한사군을 언급한다.

“전한(前漢)시대에 낙랑군이 처음 설치되었는데 응소(應邵)는 ‘옛 조선국이다.’고 말했다. 신당서(新唐書)의 주(注)에는 ‘평양성은 옛 한나라의 낙랑군이다.’ 하였고, 국사(國史)에는 ‘혁거세 30년 낙랑인들이 들어왔고 또 제3대 노례왕 4년에, 고구려 제3대 무휼왕이 낙랑을 토벌해 멸망시켰다. 그 나라 사람들이 대방과 더불어 신라로 투항해 왔다. 또 무휼왕 27년 광무제가 사신을 보내 낙랑을 토벌하고 그 땅을 취해 군현으로 했고 살수 이남은 한나라로 귀속했다. (위의 모든 글들을 보면 낙랑은 곧 평양성이 마땅한 듯하다. 어떤 이는 낙랑 가운데 두산(頭山)이 있고 그 아래가 말갈의 경계며 살수는 지금의 대동강이라 하니 누가 옳은 지 미상이다.) 또 백제 온조왕이, ‘동으로 낙랑, 북으로 말갈(東有樂浪 北有靺鞨)’이라 말한 것은 곧 옛 한나라 시절 낙랑의 속현의 땅이었다는 뜻이다. 신라인 또한 낙랑으로 칭했으므로 지금의 고려조정에서도 그렇게 인식하면서 낙랑 군부인(郡夫人)이라 칭하고 또 태조께서 경순왕 김부의 여식을 내려주면서 또한 낙랑공주라 하였다.”

일연선사의 글을 보면, 낙랑군을 지금의 평양 부근으로 비정하며 그 근거로 신당서를 들고 있다. 당신이 직접 듣고 읽은 기록에 의하면 이 이상 더 할 말이 별로 없었을 것 같다. 워낙 오래전의 일이고 이를 자세히 기록한 문헌이 없기 때문에, 중국의 사서(史書)에 부기(附記)한 정도의 글을 참고하다보니 그럴 수 있으리라 본다. 더구나 일연은 선사(禪師)이지 사학자(史學者)가 아니지 않는가. 그러면서도 낙랑 아래 말갈이 있다고도 하고 백제의 동쪽에 있다는 기록이 있다며 무엇이 옳은지 모르겠다고 고백한다. 다만 백제의 온조왕이 말한 ‘동유낙랑’에 대하여는 해명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낙랑의 속현이 백제 동쪽에 있지 않았겠나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낙랑의 속현이라면 고을 이름이 낙랑이 아닐 것이다. 그런대도 온조왕이 ‘동유낙랑’이라 하였음은 반드시 낙랑이라는 세력이 동쪽에 있었다는 말인데, 이 점은 얼렁뚱땅 넘어갈 일이 아니고 많은 문헌을 비교검토하고 갖가지 경우를 생각하면서 깊이 연구할 과제다.

현재 미국, 일본, 카나다 등 대부분의 나라가 사용하는 역사교과서에, 한국의 첫 역사는 한나라로 시작한다. 한사군, 특히 그 중심인 낙랑군의 연대는 서력기원전 108년부터 기원후 313년이니, 무려 421년이나 존속한 것이 된다. 고려의 역사가 474년인데, 거의 같은 기간이다. 그렇게 오랫동안 남의 지배를 받을 정도로 우리 민족이 주체성 없고 나약한 민족이었나 의구심이 든다. 서기 220년에 본국인 한나라가 멸망하였는데도, 식민지인 낙랑은 조선 땅 한 복판에 1백여 년 더 설치 운영되었다는 희한한 이야기가 성립하는 것이다. 더구나 낙랑의 앞에는 위만이요 그 앞은 기자(箕子)라 하니, 우리의 역사는 거의 1400년간 중국인의 지배 아래 있었다는 것이다. 과연 그러할까?

현재 한국의 사학계는 낙랑이 과연 어디에 있었느냐 하는 문제로 격렬한 논쟁이 진행되고 있다. 낙랑은 곧 우리 민족 역사의 본향인 왕검성이라 하므로 허심탄회하면서도 철저한 고증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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