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랑이 평양부근에 있었다는 인정은 고려 이후 계속되었던 것 같다. 일연선사의 기록이 그렇고 조선시대 많은 유학자들이 그렇게 여겨왔다. 그런데 우리 역사에 등장하는 낙랑이 셋인데, 첫째는 한무제가 설치했다는 낙랑군이요 다음은 광무제가 다시 배치했다는 낙랑군이요 셋째는 고구려 미천왕이 낙랑군을 토벌하자, 낙랑의 왕준이 요동에 있던 장통과 함께 모용외에게 귀순하였다. 이에 모용외는 장통을 낙랑태수로 삼았다는 것이다.

삼국유사에서 말하는, “국사(國史)에는 혁거세 30년에 낙랑인들이 들어왔고 고구려 제3대 무휼왕이 낙랑을 토벌해 멸망시켰다. 그 나라 사람들이 대방과 더불어 신라로 투항해 왔다. 또 무휼왕 27년 광무제가 사신을 보내 낙랑을 토벌하고 그 땅을 취해 군현으로 했고 살수 이남은 한나라로 귀속했다”란 기록을 검토하면 고구려 무휼왕(대무신왕)이 멸망시킨 낙랑은 한나라의 군현이 아니라, 이른 바 최리의 낙랑국이다. 여기서 논난할 여유가 없거니와 여러 기록을 검토해 볼 때, 낙랑국은 고조선의 제후국 가운데 하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낙랑국은 평양 부근에 존립했으며 신라에 침입하기도 투항하기도 한 낙랑이다. 이 낙랑을 대무신왕이 멸망시켰던 것이다. 이때의 유명한 이야기가 낙랑공주와 호동왕자다. 낙랑군이라면 낙랑왕이니 낙랑공주란 말이 아예 생길 수 없다.

다음 요서로 옮겨간 낙랑은 고구려 미천왕에 의하여 공략된 낙랑군의 유민들을 모용외가 받아들여 원래 살던 땅의 이름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일반 사학계에서는 평양에 있던 낙랑이 이 때 중국땅으로 이사하였으며 그 결과로 낙랑이 요동에 있다는 중국측 기록들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제가 되는 것은 한사군의 하나로서의 낙랑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모화사상에 젖은 고려와 근대조선의 유학자들은 기자가 동래하여 조선을 다스린 것을 매우 영광스럽게 생각하였다. 기자에 의하여 야만상태였던 조선이 드디어 윤리를 알고 예절을 아는 문화국가로 발전하였다는 것이다. 이 논리의 연장선에서 그 지역이 가급적 우리나라 깊숙이 있기를 바랐을 것이고 조선과 중국의 접경이 아닌 대동강 유역 평양까지 기자의 영토가 자리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기자의 후손인 기준을 위만이 쫓아내고 다시 조선의 임금이 되었으며 이 후손을 다시 한나라가 공략하여 이 자리에 4군을 설치하였는데, 그 핵심인 낙랑군이 평양이라는 이론이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길이 꺾기 위하여 조선인은 원래부터 중국의 신민지로 출발하였고 그 덕분에 문명이 발달하였으니, 이제 일본의 보호를 받으면 그나마 잘 살게 될 것이라고 교육하고 우리 역사를 그렇게 정립하기 위하여 조선사편수회를 두고 우리 역사를 재단한 결과, 1937년에 ‘조선사’ 35권을 발간한 것이다.

한나라가 4군을 두었다는 한나라시대의 문헌에는 낙랑의 위치가 모두 요동이지 평양이 아니다. 예를 들면, ‘후한서’ ‘광무제본기’에, “낙랑은 옛 조선국인데 요동에 있다(樂浪郡,故朝鮮國也,在遼東)”라고 분명히 말한다. 이것은 광무제가 재건했다는 낙랑도 요동이라는 사실을 입증한다. 일본이 주장하는 ‘낙랑 한반도설’은 문헌적 근거는 거의 없고 이른 바 낙랑유적과 유물에 그 논거를 두고 있는데, 과연 그것들이 진실한 것인가를 두고 논난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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