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랑토성

낙랑이 평양에 있었다는 주장은 주로 유물과 유적에 바탕을 둔다. 이른바 3천 기에 달하는 중국식 묘소가 발견된 낙랑토성과 오수전(五銖錢) 등 중국 화폐, 효문제동종(孝文帝銅鐘), 점제현신사비, 대방태수묘, 낙랑 25현을 기록한 목간 등이 그 주요유품이다. 이들은 거의 대부분 일제가 관용 학자들을 시켜 조사하고 고증한 것들이고 지금까지 낙랑군이 평양에 존재했다는 학설(낙랑군 재평 양설)의 근거가 되고 있다. 한국 각 대학의 국사학계는 이설을 대부분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 한국의 학자라면 도저히 간과할 수 없는 허점이 있다.

북한 학자들에 의하면 광복 이후 평양 일대의 무덤 3천여 기(基)를 발굴 조사한 결과 목곽묘 850여 기가 발굴되었는데, 이들은 낙랑군을 설치했다(BC 108)는 한(漢)나라가 출현하기(BC 206) 전인 BC 3세기 이전의 평양 일대의 지배적인 무덤 형태였으며, 귀틀무덤을 거쳐 벽돌무덤으로 발전하고 고구려 무덤형식인 돌 칸 흙무덤으로 전환되어 BC 1세기 무렵에는 사라졌다고 한다. 그리고 여기서 출토된 유물은 한나라 것과 다른 고조선의 대표적인 무기인 세형동검을 비롯해 조립식 쇠단검, 조립식 쇠장검, 질그릇과 마구 등이 나왔다한다. 오수전과 화천은 한나라의 화폐가 맞으나, 한반도 곳곳에서 출토되기 때문에 당시 동아시아 무역의 실태를 알아야 올바른 해석이 가능하다고 본다. 효문제동종과 점제현신사비는 일제가 한사군 재평양설의 결정적 근거라고 흥분한 유물이었으나, 대방태수묘와 함께 일제의 조작으로 밝혀진 바 있다(SBS 스페셜 2011. 3.1절 기념 참조). 공문서에 해당하는 봉니(封泥)와 목간 역시 진위의 시비가 많고 일률적으로 인정할 수 없는 허점이 많다.

낙랑토성과 그 유물에 대하여, 여러 증거 자료들을 감안할 때, 일부 봉니 위조가 있다 한들 낙랑군 평양설이 흔들리는 것은 아니라는 입장이 있다. 이에 대하여 평양지역에서 발견된 중국계 유물이 몽골 북부 일부 지역에서도 나오기 때문에, 낙랑 유물이라는 것도 결국 지배가 아닌 교류의 증거라 볼 수 있다는 학설도 있고 낙랑토성이 백제토성일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런데 중국계 유물만으로 낙랑군의 존재를 인정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고구려만해도 많은 중국인 포로를 데려와서 평양이나 황해도 일대에 살게 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삼국사기’는 미천왕이 재위 3년(302) 현도군 사람 8천여 명을 사로잡아 평양으로 옮겼다고 전하고 있고, 재위 14년(313)에는 낙랑군 남녀 2천여 명을 사로잡아 왔다는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 고국양왕 2년(385) 조는 “요동과 현도를 함락시켜 남녀 1만 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고”고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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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용섭 삼국유사사업본부장

다. 역사기록에만도 2만 수천 명의 중국인 포로가 평양주위에 거주했던 것이다. 이들이 한나라계통의 물건을 사용할 수도 있다. 그리고 국제 교류의 결과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기록이다.

낙랑군을 설치하였다는 것은 그 부근의 원래 지명인 낙랑이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낙랑군은 위만조선의 수도에 설치되었고 위만조선은 기자조선 중심지에 위치하였다 하는데, 여기에는 중국의 갈석산이 키워드가 된다. 다음 회에서는 낙랑군을 찾는 문헌연구를 요약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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