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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경부근의 영평부 고성.

낙랑의 위치를 과학적으로 고증하기 위하여 우선 고조선의 중심부가 어디에 있었느냐는 연구가 중요하다. 현재 우리가 인식하는 고대사의 통념은, 단군의 고조선이 후기에 이르러 기자조선이 되었고 이 기자조선을 위만이 차지하여 위만조선이 되었다. 기자의 이름은 자서여(子胥餘)인데, 중국 은나라의 왕족이며 유교에서는 성현의 반열에 올라간 인물로 추앙된다. 기자는 은나라가 기원전 1122년에 주나라 무왕에게 멸망당하자 조선땅으로 망명하였으며, 이에 주 무왕이 그를 조선후로 봉했으나 신하가 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기자는 주 무왕에게 천하를 다스리는 요법인 홍범구주(洪範九疇)를 전했다.

 

기자가 조선의 임금이 된 이후, 그의 후손이 1천여 년 동안 고조선을 다스리다가 42대 기준 때, 연나라의 망명객 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겼다. 기자일족이 밀려오자 단군은 장당경으로 수도를 옮겼다고 삼국유사는 전한다. 그러니까, 일연선사의 기록으로 볼 때, 기자조선과 단군조선이 일정기간 공존한 것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다. 그런데 '대명일통지'에는 영평부에 고죽국이 있고 조선성이 있는데, 기자가 조선후로 책봉된 곳이라 한다.('大明一統志' 京師條: 在永平府十五里 孤竹君所封也 朝鮮城在永平府境內 相傳箕子受封之地).

그러면 영평부의 위치는 어디인가? 영평부는 고대 하(夏)나라 때 기주(冀州), 주(周)나라 때는 유주(幽州)에 속했다. 서진(西晋) 시대엔 평주(平州)였고 원나라 때 영평부로 바뀌면서 노룡에 치소를 두었다. 지금은 하북성 노룡현이다. 모두 평양과는 거리가 멀다. 난하(灤河) 하류에 영평부란 성곽이 남아 옛 모습의 흔적을 보여준다.

청나라의 백과사전인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 '지지(地誌)'에는 영평에 조선성과 조선현이란 지명이 기록되어 있다.

기원전 108년 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치지 직전, 한나라의 제후로 있던 유안(劉安:BC 179~BC 122)이 쓴 '회남자(淮南子)'에 고조선의 위치가 나오는데, 현재의 하북성 일대로 되어있다.

“동방의 끝, 갈석산으로부터 조선을 지나 대인(大人)의 나라(東方之極 自碣石山過朝鮮 貫大人之國)”라 하였는데, 주석에도 갈석은 중국 북동부 바닷가에 있고 조선은 낙랑의 현이라 하고 조선은 곧 동이(東夷)인데 대인지국이라 하였다.(碣石,在遼西界海水西畔. 朝鮮,樂浪之縣也. 貫,通也.大人國在其東. 逵吉按 '太平御覽'. 注云碣石在東北海中.朝鮮,東夷.東方有大人之國也)

이 글에서 우리는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 조선국이 중국의 동쪽 국경에 있는데, 갈석산을 지나면 바로 조선이라는 것이다. '한서(漢書)'에서도 한무제가 갈석을 지나 낙랑, 현도군을 설치했다고 밝히고 있다. 둘째, 조선은 대인지국, 군자지국, 예의지국으로 존칭되었다는 사실이다. 현재 갈석산은 하북성 창려현에 있다. 그러나 한나라 시절의 갈석은 지금의 노룡현 백석산(白石山)이라는 설도 유력하다.

중국 최고(最古)의 지리서인 '산해경(山海經)' '해외동경(海外東經)'은 “군자의 나라가 북방에 있는데, 그들은 의관을 갖추고 칼을 차며 짐승을 먹이고 호랑이를 곁에 두고 부리며, 사양하기를 좋아하고 다투기를 싫어한다(君子國在其北 衣冠帶劍 食獸 使二大虎在旁 其人好讓不爭)”라 기록하였다. 문무겸전한 군자인 우리 선조의 멋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산해경(山海經)' '해내경(海內經)'에는 조선의 위치를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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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용섭 삼국유사사업본부장

“연경에서 중경을 가는 도중에 조선하를 지나서 고북구에 도달한다”라고 한 '무경총요'의 기록에 따르면 조선하는 고북구 서쪽에 위치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현재 중국지도상에서 찾아보면 조하(潮河)는 고북구 서쪽에 있고 난하(灤河)는 고북구 동쪽에 있다. 이는 바로 오늘의 조하(潮河)가 송나라 때는 조선하로 불렸다는 확실한 증거가 된다.

 

 

'무경총요'는 지금으로부터 근 천여 년 전인 1044년에 편찬되었다. 시기적으로 볼 때 여기서 말하는 조선하는 500년 전에 압록강 이남에 건국되었던 이씨조선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

 

조선하가 압록강 이남 지역의 평양이나 서울 일대가 아닌 북경 부근에 있었다는 것은 고대의 조선은 한반도가 주무대가 아니라 대륙 깊숙이 중원의 요서지역에 자리하고 있었던 사실을 단적으로 증명한다.

 

1) 한서(漢書) 「지리지」 ‘요동군(遼東郡)조’ 에서 말하는 왕험성과 패수의 위치

「요동군……험독(險瀆)현〔응소(應劭)는 “조선왕 위만의 도읍이다. 물이 험한데 의지했으므로 험독이라고 했다”고 말했다. 신찬(臣瓚)은 “왕험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다. 이것이 바로 험독이다.”라고 했다. 안사고는, “신찬의 설이 옳다. 패(浿)의 발음은 보(普)와 대(大)의 반절이다”라고 했다〕 遼東郡……險瀆, 〔應劭曰, “朝鮮王滿都也。依水險,故曰險瀆”, 臣瓚曰, “王險城在樂浪郡浿水之東,此自是險瀆也” 師古曰, “瓚說是也。浿音普大反”〕」

BCE 300년경 연나라가 번조선을 침입하였을 때, 만번한(滿番汗)을 새로운 국경으로 정하였다. '사기','위략','삼국지''위서동이전' 등 중국 사서도 이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심백강 선생은 위략의 주석에만 있다고 함) 중국 사가들은“고조선의 서쪽 땅 2천여 리를 빼앗았다”는 구절을 더하였다. 만번한은 만현(滿縣)과 번한현(番汗縣)을 합친 말로서, 만현은 지금의 요령성 개주시 지역이고, 번한현은 그 인근의 해성시 지역이다. 연나라에게 2천 리를 빼앗겨 줄어든 강역의 새 국경이 요동반도였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고조선의 원 국경은 어디였는가? 고조선의 위치를 처음 언급한 '산해경(山海經)'과 '사기(史記)', '전국책(戰國策)', '설원(說苑)', '수경주(水經注)' 등의 기록으로 볼 때, 지금의 영정하(永定河) 이남이 고조선의 국경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윤용섭 삼국유사사업본부장
조현석 기자 cho@kyongbuk.com

디지털국장입니다. 인터넷신문과 영상뉴스 분야를 맡고 있습니다. 제보 010-5811-4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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