千山木落後 (천산목락후·산마다 나뭇잎 모두 떨어지고)
四海月明時 (사해월명시·온 세상 달 밝은 때)
蒼蒼天一色 (창창천일색·푸르고 푸른 하늘은 한색이니)
安得辨華夷 (안득변화이·어찌 중화니 오랑캐니 구분할 수 있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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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태 전 검찰총장
이 시는 중국의 하늘이나 조선의 하늘이나 푸르기는 매한가지인데 어찌 화이(華夷)의 차별이 있느냐고 묻고 있다. 이는 단순히 화이의 차별만이 아니라 지배층과 피지배층으로 나뉘어 그것이 곧 귀천과 온갖 차별을 낳고 있는 현실과 이를 뒷받침하는 주자학적 세계관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으며, 불교를 차별하고 승려를 천시하는 차별 구조에 대한 거부감을 나타내고 있다. 임진왜란으로 국가가 위기에 처하자 화이, 귀천, 승속 여부에 상관없이 모두가 나섰는데 여전히 그런 구도를 벗어나지 못하는 지배층에 대한 꾸짖음인 것이다. “하늘의 별은 북극성을 중심으로 돌고, 인간 세상의 물줄기는 모두 동해로 흘러간다 (天上有星皆拱北 人間無水不朝東)”


청허 휴정 스님은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안주목사 이사증(李思曾)의 도움으로 성균관에서 수학하던 중 지리산에서 경전을 보다가 불법에 이끌려 출가했다. 제방을 순력하면서 수행하다 한낮의 닭 울음소리를 듣고 크게 깨쳤다. 임진왜란 때는 선조가 도움을 요청하자 팔도십육종도총섭(八道十六宗都摠攝)이 되어 승려들의 전쟁 참여를 독려하며 많은 공을 세웠다. 이후 묘향산 원적암에서 자신의 영정 뒤에 ‘80년 전엔 그가 나였는데 80년 후엔 내가 그대이구려(八十年前渠是我 八十年後我是渠)’라고 써서 제자들에게 주고는 가부좌를 한 채 입적했다.

스님은 선(禪)은 부처의 마음이고 교(敎)는 부처의 말씀이니, 선과 교를 통합하되 단순히 선교 일치가 아니라 교를 통하되 교를 버리고 선에 들어가는 길을 제시했다. 그의 선은 초월적 진리에 바탕을 두면서도 신비주의나 염세주의에 흐르지 않았고 유가나 도가, 심지어 민간 신앙까지 깊이 존중하는 자세를 가졌으며 당연히 민초들의 안위와 생명 보호에 진력했다.

선을 중심으로 교를 아우르는 불교의 전통을 확립하여 불교의 명맥을 잇는 데 크게 기여하였으며 뛰어난 준족을 포함 천여 명에 달하는 제자들을 배출하여 그들로 하여금 조선 후기 불교를 이끌게 했다.

조선 불교사로 볼 때 이때쯤 그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 후 한국 불교가 어떻게 되었을지 짐작하기가 어렵지 않다. 조선은 건국 초부터 철저하게 억불정책을 폈지만 명종대 선교 양종의 인정과 승과의 시행 등으로 수많은 승려가 배출되어 이들이 왜란 때 의승군의 주력이 되었고, 다시 청허의 도제 양성으로 이들이 호란 등의 혼란기에 같은 역할을 했으니 참으로 역사는 얄궂다. 인간은 편협하되 강산은 복이 있는 것인지. ‘나라를 사랑하고 사직을 걱정하는 것은 산승도 한 사람의 신하이기 때문이다(愛國憂宗社 山僧亦一臣)’라는 청허의 국가관은, 불교가 국가 위기 시 불교적 주체를 세워 위기 극복에 총력으로 나섬과 아울러 승단의 결속과 발전을 이루는 데 나름 기여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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