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해도 아닌 中 하북성 지역에 있었는 듯

대방은 본래 진번군의 일부였으나 기원전 82년에 낙랑군에 편입되었다 한다. 먼저 반고의 “한서(漢書) 권28下 지리지” 유주자사부(幽州刺史部) 낙랑군 부분을 살펴보자.

“낙랑군은 호구가 62,812호며 인구는 466,748명인데 조선,엄한,패수,함자,점제,수성,증지,대방,사망,해명,열구,장잠,둔유,소명,누방 등 25현이 있다.” 낙랑군의 25현 가운데 대방현이 있고 앞서 고찰한 둔유와 현도도 나온다. 대방은 원래 낙랑의 일개 현이었다. 열구(列口)란 지명은 아무래도 열수(列水)가 바다로 들어가는 입구라는 시사를 주는데, 실제 “열수는 요동에 있다.”는 후한서의 기록이 있다.

다음 “후한서”다. 후한서에도 “군국지(郡國志)” 유주(幽州)의 낙랑군 가운데 대방이 보인다. 즉, 낙랑군은 무제가 설치했는데 낙양 동북 5천리이며 18성(樂浪郡武帝置。?陽東北五千里。十八城), 호구 61,492호, 인구 257,050명이며, 조선현과 대방현 등을 보유한다고 기록하였다.

“한서 지리지”에는 낙랑이 25현으로 구성되어있고 “후한서 군국지”에는 18성이다. 낙도가 들어가고 탄열,동당,불이,잠대,화려,야두미,전막,부조의 8현이 사라져 인근 어디에도 이 8현의 이름은 없다.

“후한서”에는 큰 군과 낙양과의 거리를 적어두었으므로 대방의 위치를 추정할 수 있다. 낙랑이 낙양동북 5천리이므로 낙랑의 소속인 대방도 낙양동북 5천리 전후일 것이다. 낙양에서 대군(代郡)이 2,500리, 상곡 32,00리, 요서 3,300리(지금의 요서보다 더 중국 쪽에 위치), 요동 3,600리로서 대군이 중간지점이다. 한나라시대 중국지도를 펼치고 살펴보면 낙양동북 5천리는 지금의 요서부근이다. 도저히 황해도 황주까지 올 수 없음은 자명하다. 중국사회과학원 주관(담기양 편) 1982년판 “중국역사지도집” 40~41쪽을 보면 불과 100리 거리인 상곡과 요서의 간격을 지도상 1천리 이상 벌여놓았다. 중국이 얼마나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가소로운 예다.

대방이 독립된 군(郡)으로 확실히 자리 잡은 것은 서진(西晋)시대다. 사마염은 삼국을 통일하고 군국제(郡國制)를 시행, 전국을 재편하면서 대방군을 평주 소속(창려,요동,낙랑,현도,대방의 다섯 군을 유주에서 분리)으로 두었다. 따라서 평주의 위치를 비정하면 낙랑군과 대방군의 위치가 파악된다. 평주(平州)는 우임금 시절 기주(冀州)로서 치소는 양평(襄平)이다. 기주는 현재 하북성 중남부와 산동성,하남성 일부에 해당한다. 양평은 삼국시대 공손연이 사마의와 싸우다 패한 곳인데 고구려가 점령하여 요동성으로 삼은 땅으로서 대동강과는 거리가 멀다. 후한서 ‘원소유표열전’에, 양평은 요동군에 속하는데 그 옛 성이 오늘날 평주 노룡현 서남쪽에 있다는 기록이 있다. 요나라 때, 양평은 오늘의 요녕성 요양(遼陽)으로 그 이름이 옮겨 갔다.

대방은 낙랑의 아래이므로 낙랑이 밝혀지면 대방의 위치는 따라 규명된다. “진서(晋書) 지리지”에 평주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고 장성이 일어난다(遂城縣有碣石山 長城所起)는 기록이 있다. “태강지리지”에도 같은 기록이 있다. 이 수성현을 중국과 한국의 학자들은 황해도 수안(遂安)으로 간주하고 민족사학자들은 하북성 창려현 갈석산으로 비정한다(심백강은 연나라 장성의 기점이 있는 하북성 보정시 수성진으로 단정). “수서 지리지”는 요서에 대방산(帶方山)이 있다하고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는 북경동쪽에, 산 중턱에 암석이 띠 모양으로 되어 있는 대방산이 있다고 기록한다. 이상 고찰한 바와 같이 대방은 한국의 황해도에 있었다는 주장보다는 중국 하북성 지역에 있었다는 설이 유력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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