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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용섭 삼국유사사업본부장
언론의 자세를 이야기할 때 또는 사관(史官)의 자격을 논할 때 가장 유명한 고사는 ‘동호직필(董狐直筆)’이리라. 동호직필이 고사성어가 된 사유는 이렇다. 춘추시대도 깊어갈 무렵, 춘추 최강국이던 진(晋)나라에 영공(靈公)이 임금으로 있었다. 실권자는 조돈(趙盾)이었는데, 정경(正卿)이라는 높은 벼슬을 했다. 그런데 진령공은 폭군이며 우둔했다. 하여 그의 잘못을 늘 간하는 조돈을 싫어해 마침내 죽이려 했다. 조돈이 극적으로 화를 면해 달아나다가 집안 동생인 조천(趙穿)을 만나자, 조천은 국외로 나가지 말고 숨으라면서 군사정변을 일으켜 임금을 죽이고 진성공(晉成公)을 새 임금으로 세웠다. 조돈은 다시 국정을 전단하고 조씨 일문(一門)의 권세와 명망은 진나라를 넘어 열국(列國)에 가득했다. 세월이 흐른 어느 날, 조돈은 영공을 몰아낸 그 날의 사건을 역사에는 혹시 어떻게 기록되었나 궁금하여 사관인 태사 동호(董狐)에게 기록을 청해 보았다가 대경실색했다. “을축년(기원전 607) 가을 7월, 조돈이 도원(桃園)에서 나라의 임금(國君) 이고(夷皐)를 죽였다”라 적혀있는 것이 아닌가! 조돈이 극구 자신은 그 일을 보지도 못했는데, 어떻게 내가 임금을 죽였다고 적을 수 있느냐고 따졌으나, 동호는 대감이 당시 나라의 재상인데 국경 내에 있었고 동생이 임금을 죽였지만, 돌아와 처벌하지 않았으니, 자신이 죽인 거나 마찬가지라는 논리였다. 조돈이 그날 동생 말을 듣고 국경을 넘지 않았다가 후세에 길이 임금을 죽인 신하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며 한탄하였다는 이야기다.

여기서 우리가 새겨야 할 교훈의 첫째는 역사의 중요성이다. 오늘날 일어나는 사건의 의미와 평가는 결국 역사를 통해 검증되고 재평가된다. 둘째는 사관의 예리하고 엄격한 안목과 붓이다. 셋째는 조돈의 넓은 아량과 올바른 정신이다. 막중한 권세를 지녔지만, 그는 기록의 수정을 요구하지 않고 이후 매사에 더욱 자숙하며 공정하게 재상의 업무를 보았다. 공자(孔子)는 동호를 옛날의 훌륭한 사관(良史), 조돈을 훌륭한 신하(良大夫)였다고 평했다.

지난 27일 대검은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그 전에 국회는 현직 대통령에 대한 탄핵심판을 청구했으며 헌재는 그를 파면했다. 작금 언론의 주류와 국민 여론은 이를 환영하는 기조다. 그러나 역사적 평가는 알 수 없다. 국회의 탄핵과 헌재의 판결을 논리적으로 비판하는 식자층도 많다. 본 사건은 이제 본격적인 심리 절차에 들어갔으며 사건의 전후 맥락을 가르는 전모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 발단이라 할 수 있는 고영태 일당을 대상으로 하는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태블릿 PC의 진실보도와 관련한 방송통신위원회의 결정이 연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회의 모든 권력은 탄핵 결정을 칭찬하는 쪽으로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 긴 역사의 흐름에서 볼 때, 법률의 잣대는 물론, 사회윤리와 관습, 민족의 문화전통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이 사건이 후세에 어떻게 기록되고 평가될지 알 수 없다. 역사적으로 모든 큰 사건은 당대에는 거의 옳았다. 그러나 후세에까지 옳기는 어렵다. 필자 자신이 과거, 시대에 꼭 필요하고 가치 있는 일이라는 확신으로 타의 충고를 뿌리치고 추진한 일을 10여 년이 지난 뒤 후회한 게, 한두 가지 아니다. 부디 오늘의 결정이 나중에 고통스러운 부담이 되지 않도록 진중 또 진중히 하기를 바라는 노파심을 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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