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왕경(경상북도 제공)

고구려조에 이어 나오는 삼국유사 변한 백제조항은 대략 다음과 같다.

백제는 남부여(南扶餘)라고도 하니, 곧 사비성(泗?城)이다. 신라시조 혁거세 즉위 19년 임오(壬午)년(기원전 39년)에 변한 사람이 나라를 바쳐 항복해 왔다. 《신·구당서》(新舊唐書)에 이르기를 변한의 먼 후손들은 낙랑(樂浪) 땅에 있다 한다. 《후한서》(後漢書)에 이르기를 변한은 남쪽에, 마한은 서쪽에, 진한(辰韓)은 동쪽에 있다 한다. 최치원(崔致遠)이 이르기를 변한은 백제라 하였다. 《본기》(本記)에 의하면 온조(溫祚)가 홍가(鴻嘉) 4년 갑진(甲辰)년(기원전 17년)에 나라를 세웠으므로, 혁거세·동명의 세대보다 40여년 늦은 것이다. 그런데, 《당서》(唐書)에 이르기를 변한의 먼 후손은 낙랑의 땅에 있다고 하는데, 이는 온조의 계통이 동명에서 나온 것이기에 이렇게 이른 것일 뿐이다. 백제의 땅에 변산(卞山)이 있었으므로 변한(卞韓)이라 일렀다. 백제의 전성기 때에 가구 수는 십오만이천삼백(152,300)호(戶)였다.

변한을 백제, 마한을 고구려, 진한을 신라로 보는 것은 최치원의 학설인데, 일연은 이를 계승하였다. 온조가 세운 백제가 동명에서 나왔다는 것은 일연도 인정한다. 백제 건국에 대하여는 다음 회로 미루고 삼국유사의 순서대로 진한에 관한 기사를 읽기로 한다.

《후한서(後漢書)》에 이르되, “진한(辰韓)의 늙은이들이 스스로 말하기를, 진(秦)나라의 망명자들이 한국(韓國)으로 들어오니, 마한이 동쪽 경계의 땅을 나누어 그들에게 주었다. 서로를 같은 무리(徒)라 부르며 진(秦)나라 말과 닮은 점이 있어, 진한(秦韓)이라고도 했다. 열두 개의 작은 나라가 있는데, 각 1만호다. 최치원이, “진한(辰韓)은 본디 연(燕)나라사람이 피신한 곳이다. 그러므로 탁수(?水)의 이름을 취하여, 거주하는 고을과 마을의 이름으로 불렀으니, 사탁(沙?)·점탁(漸?)등이다”라 말했다. 신라의 원주민이 중국땅에서 왔다는 이야기다.
 

신라 왕경(경상북도 제공)

신라 전성기 때의 서울에는 17만 8936호(戶), 1360방(坊), 55리(里), 35채의 금입택(金入宅)이 있었다. 금입택이란 금으로 지은 집이라는 뜻인데, 지금 일본에 남아있는 금각사(金閣寺)를 생각하면 될 듯하다. 남택(南宅),북택(北宅),본피택(本彼宅),양택(梁宅),지상택(池上宅),재매정택(財買井宅) 등 35택이 있고 다시 계절에 따라 노니는 사절유택(四節遊宅)이 있는데, 봄에는 동야택(東野宅), 여름에는 곡량택(谷良宅), 가을에는 구지택(仇知宅), 겨울에는 가이택(加伊宅)이다. 제49대 헌강대왕(憲康大王) 때, 서라벌의 성 안에 초가가 하나도 없고, 처마가 닿아 있으며 담장이 연이어 있었다(城中無一草屋 接角連墻). 노랫소리와 피리소리가 길에 가득하여 밤낮으로 끊이지 않았다(歌吹滿路 晝夜不絶).

헌강왕은 876년부터 886년까지 10년정도 왕위에 계셨는데, 화랑 김응렴으로, 그리고 당나귀귀로 유명한 경문왕의 대를 이었다. 나라에 다소 불안한 조짐도 보였으나, 임금이 직접 거문고를 뜯고 가사를 지어 부르는 등 국태민안하였다. 당시 중국에는 황소의 난으로 어지러웠고 마침내 최치원이 귀국했다. 동해 개운포에서 처용을 얻어 신라 조정에서 일하게 한 게 이때다. 황금의 나라며 예술의 나라로서 당나라 장안(長安), 동로마제국의 콘스탄티노플과 함께 세계적인 문화도시였던 경주의 모습을 삼국유사는 담담히 그리고 있다. 이란의 쿠쉬나메란 대서사시는 페르시아왕자와 신라공주의 사랑과 모험을 노래하고 있는데, 아마도 헌강왕 무렵이 그 배경일지 모르겠다. 637년 카다시아 전투에서 이슬람교의 아랍이 페르시아를 격파하자 페르시아왕자가 신라로 망명하였다 하므로 시간대도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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