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석 암반 사이 맑은 물에 '삼전도 굴욕' 흘려보내리

▲ 달이 비치는 연못이라는 뜻의 월연과 월연암. 월연암 위에 세워진 농월정.

남덕유산에서 일어난 금천은 60리를 흘러가며 산을 깎고 바위를 굴리고 나무를 키워 화림동계곡을 만들어냈다. 화림동계곡은 거연정을 시작으로 동쪽으로 흐르다가 황석산에서 내려온 물줄기를 받아들여 내를 이루고 광풍루 앞에서 끝을 맺은 뒤 남천으로 이름을 바꿔 흐른다. 화림동계곡이 거연정, 군자정,동호정을 거쳐 황석산에서 내려온 물과 합쳐 큰 내를 이루는 지점에 농월정이 있다. 급하게 흐르던 물은 농월정에 이르러 무려 1,000여평에 이르는 반석이 펼쳐 놓았다. 그 위를 맑은 물과 소나무가 어우러져 이 일대가 조선의 ‘무릉도원’으로 불렸다. 지금은 아름다운 경관 덕에 국민관광지로 지정됐다.

농월정은 지족당(知足堂) 박명부(朴明傅·1571∼1639)가 1638년 지은 정자다. 박명부는 임진왜란과 광해해군집권, 인조 반정과 정묘호란의 혼란한 시기를 몸으로 부딪치며 겪은 관료이다. 선조 23년 증광시 병과에 급제했던 그는 지조 높고 꼿꼿한 선비였다. 합천 군수로 부임했을 때 북인의 영수이며 광해군의 ‘왕의 남자’였던 정인홍이 합천에 있었으나 그의 집에는 출입조차 하지 않았다.

농월정 편액은 중국 명나라 사신 주지번이 썼으나 정자가 본래 타 없어지면서 최근 새로 쓴 것이다.
인조반정 후 예조참판을 지내던 중 병자호란을 겪으며 남한산성에서 강화를 반대했으나 왕은 결국 항복하고 삼전도에서 ‘삼배구고두례’의 예를 취한다. 이른바 ‘삼전도의 굴욕’ ‘성하지맹’이다. 굴욕을 견디지 못한 그가 벼슬을 버리고 물러나 은거한 곳이 ‘농월정’이다. 박명부는 이후 예조참판 한성판윤 도승지를 지냈다. 저서로는 지족당 문집이 있다.

길 옆에 있는 별천지의 그윽한 곳을 누가 알리오
산은 빙 둘러 있고 물은 머무는 듯하네
선돌을 비친 못의 물은 맑고도 가득차고
창에 찾아든 푸른 기운은 걷히다가 다시 뜨네
주린 아이 죽으로 입에 풀칠하여도 화내지 않고
손님이 와서 집에 머리를 부딪쳐도 싫어하지 않네
노는 사람들 일 없다 말하지 말게나
늙어서 멋대로 속세를 떠나니 또한 풍류일세
- 지족당 박명부의 시 ‘농월정’

농월정 편액은 명나라의 학자이며 서예가인 주지번이 썼다고 한다. 주지번은 명나라 산동사람으로 이부시랑 벼슬까지 한 사람이다. 조선에 사신으로 왔을 때 일체의 뇌물도 받지 않았다. 그가 어떤 연유로 농월정 현판을 쓰게 됐는 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토산 장복추가 쓴 ‘농월정 중건기’에 “안음의 월연 위에 농월정이 있으니 옛날 판서를 지낸 지족당 선생 박공의 지은 바로, 총명한 임금님이 계실 때의 학자 주지번이 편액을 손수 쓴 것이다”라고만 적혀 있다.

농월정 안에서 본 화림동 계곡. 1천여평의 암반 반석이 장관이다.
농월정의 농월은 ‘음풍(吟風)’과 듀엣이다. ‘음풍농월’바람을 읊고 달을 희롱한다는 뜻이다. 맑은 바람과 달을 즐기며 시를 읊는 풍류 쯤으로 생각하면 좋겠다. 조선 선비의 음풍농월의 미학을 잘 설명한 시가 화담 서거정의 독서유감(讀書有感)이다.

“책을 읽을 때는 경륜에 뜻을 두었으나/ 늙어서 돌아보니 안자의 가난이 오히려 달갑구나 /부귀는 시샘 많아 손대고 싶지 않고 /자연을 즐기는 데는 금도가 없으니 심신이 편안하도다/ 산나물 뜯고 물고기 잡아 배를 채우고/ 음풍영월로 마음을 풀었네/학문이란 의혹이 없는데 까지 이르러야 시원히 넓어지나니 상쾌하나니/인생 백년이 헛됨을 면하였도다”

‘음풍’은 공자의 제자 증점이 ‘기수에서 목욕하고 무에서 바람을 쐰 뒤 노래 부르며 돌아 오겠다’고 한 그 경지이다. 농월은 이태백이 놀던 달의 세계와 닿아 있다. 이태백이 달과 함께 노는 방식은 애월(愛月) 망월(望月) 보월(步月) 승월(乘月) 취월(醉月) 남월(擥月) 여월(艅月) 완월(玩月) 숙월(宿月) 농월(弄月)이다. 그의 시에 무시로 등장하는 단어다. 그 중 대표적인 달 감상법이 완월과 농월이다. 완월의 ‘완(玩)’은 ‘옥(玉)’을 ‘으뜸(元)’ 가는 보배로 여겨 감상한다는 뜻이다. 농월의 ‘농(弄)’은 ‘옥(玉)’을 ‘두 손으로 받들어 조심스럽게 만지는 형상?’이다. 

농월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달을 희롱하다는 뜻과는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이다. 박명부는 관리로서 임진왜란과 광해군, 인조반정과 정묘호란의 혼란을 겪었던 사람이다. 정묘호란 때 결사투쟁을 외쳤던 그가 벼슬을 버리고 와 정자를 짓고 농월정이라 이름한 데는 남들이 생각하는 음풍농월과는 다른 의미의 음풍농월이 있었던 것이다.

지족당선생 장구지소 각자는 농월정 옆에 새겨져 있다.
박명부는 농월정 이름을 이태백시에서 착안했다. 이태백이 읊은 수 없이 많은 달의 노래 중에서 그가 주목한 시는 제나라의 재사 노중련을 노래한 ‘고풍 10수’다. “제나라에 기개 있고 빼어난 인재 있어 /노중련이 특히 출중하나니/ 밝은 달이 바다 밑에서 떠올라 / 하루 아침에 섬광을 비추듯이 / 진나라 물리친 영예로운 명성이 진동하여 / 후세는 그의 은덕을 우러러 보나니(후략)” 노중련은 전국 시대 때 제나라 맹상군의 식객이다. 그는 기발하고 장쾌하게 그리고 세속을 초탈한 책략을 구사하여 명성을 날렸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부귀에 전혀 뜻을 두지 않고 고상한 절개를 지켰다. 제나라 100만대군 앞에서 풍전등화의 위기에 선 조나라를 구한 재사로 유명하다.

박명부는 ‘밝은 달이 바다 밑에서 떠올라 하루 아침에 섬광을 비추듯이 진나라를 물리친’ 노중련을 ‘달’로 대입했다. 옥을 두 손으로 받쳐들고 조심스럽게 만지는 형상인 ‘농(弄)’자를 써 농월정으로 이름했다. 임진왜란과 정묘호란을 겪은 혼란스러운 나라의 관료로서 자신의 역량부족이 한없이 부끄러웠을 것이다. 노중련과 같이 두둑한 배짱과 의기로 나라의 어려움을 해결할 인재나 지혜를 간절히 염원했을 터였다.

지족당 선생 장구지소. 지족당 박명부가 지팡이와 신발을 끌며 산책하던 곳이라는 각자.
농월정에 있는 5편의 중수기와 건량송에는 한결 같이 ‘농월’의 의미를 노중련과 연결하는 있는 점이 이를 잘 뒷받침하고 있다. “노련(노중련)은 전국시대 제국인 인데 조,위 두왕이 진왕을 황제로 존칭하려했다. 노련이 동해에 몸을 던져 죽을 지라도 진나라 백성이 되기를 원치 않는다 하므로 당시에 그를 의를 지키는 천하의 고사로 칭하였다. 밝은 달이 노련이요, 노련이 밝은 달이다. 선생(박명부)이 동해상인으로 밝은 달을 노련에 비해 즉 저 노련에 빛이 있다 하셨다. 요즘 사람들이 만약 선조께서 다만 산수의 아름다움만 취하여 이 정자를 지었다고 한다면 선조의 참뜻을 알지 못한다 하겠다” (박응환이 지은 ‘농월정 중건실기“)

▲ 글 사진 /김동완 여행작가
농월정은 2003년 10월 방화로 추정되는 화재로 불에 타 없어지고 현재의 정자는 2015년 함양군이 새로 지었다. 옛모습대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에 뒷면 가운데 한 칸에 방을 두었으며 네귀에 활주를 두었다. 활주 밑부분은 자연암반 위에 돌기둥을, 윗부분은 나무기둥을 세웠다. 1천여평의 자연석 암반사이로 맑은 물이 앞다투어 소리내 흐르는 광경은 울주군의 작천정과 닮았다. 농월정 앞을 흐르는 물은 암반 사이에 잠시 머물렀다 가는 것처럼 보이는데 물이 머무는 곳이 월연이다. 달이 비치는 연못이다. 월연과 맞닿은 암반이 월연암이다.농월정은 월연암 너른 바위에 세워졌다. 바위위에는 ‘화림동 월연암(花林洞 月淵岩)’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고 정자 옆에는 ‘지족당선생장구지소(지족당 선생이 지팡이와 신발을 끌던 곳, 산책하던 곳)’라는 붉은 각자가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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