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단물결에 신선 노니는 선경…자연이 그린 한폭의 수묵화

▲ 금선정은 금계 황준량을 기리기 위해 금선계곡에 세운 정자이다. 금선 계곡은 조선 10승지 중 제일승지다.
금계천은 소백산 비로봉(1,439m)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영주시 풍기읍 삼가리와 욱금리, 금계리와 교촌리를 지나 서천으로 합류하는 하천이다. 금계천은 욱금리 금계저수지와 금계리 장생이 마을까지 1.5km 구간을 지나면서 금선계곡이라는 절경을 빚었다. 금선계곡에는 기암괴석과 수백 년 된 노송이 들어서 이름 그대로 ‘비단물결에 신선이 노니는’ 선경이 펼쳐진다. 이 일대가 ‘정감록’에 기록된 10승지 중 제1승지다.

금선정은 조선의 제 1승지 금선계곡의 끝자락, 언덕 아래 엎드려 있다. 1781년(정조 5) 풍기군수이던 이한일이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 1517~1563)을 기려 지역유지와 후손들과 힘을 합쳐 세웠다. 황준량이 금선정 아래 너럭 바위를 금선대라 명명한 뒤 음풍농월하던 곳이다.

기이한 바위에 옥 자물쇠가 어지럽게 퍼져있고
사나운 계곡 물에 얼음 방울이 튄다
누대에서 한 단지 술을 마음껏 마시니
알록달록 꽃 그림자가 봄 산을 뒤흔든다
- 황준량의 시 ‘금선대에서 노닐다’

풍기군수 송징계가 새긴 금선정(錦仙亭) 암각서.
바위 그 자체가 기단인 금선정에 새겨진 금선정(錦仙亭) 암각서.
명망 있는 선비들도 앞다투어 아름다운 풍광을 찾아 시를 짓고 즐겼다. 황준량의 스승인 퇴계 이황도 풍기군수 시절 이곳을 찾아 ‘신선될 재주가 없어 삼신산을 못 찾고 구름경치 삼아 시냇물을 마셔보네. 얼씨구 풍류 찾아 떠도는 객들이여. 여기 자주 와서 세상시름 씻어보세’라며 시를 남겼다. 금선정 아래 ‘錦仙臺’ 암각서는 1756년(영조32) 풍기군수 송징계가 새겼고 편액은 금선정 건축 4년 뒤에 풍기군수 이대영이 당시 성주목사이던 조윤형의 글자를 받아 걸었다. 편액은 계곡을 바라보는 동쪽 처마와 출입구인 남쪽 처마 아래 각각 걸려 있다. 당초 정자 안에는 시판이 빼곡히 걸려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도둑맞고 없어졌다고 한다.

금선정은 조선의 소박하고 고졸한 건축미학을 그대로 보여주는 정자다. 정면 2칸 측면 2칸 구조이며 벽체 없이 네 면이 개방된 전형적인 정자 양식이다. 정자 기둥의 길이가 모두 다르다. 암반의 굴곡을 그대로 살려 기둥의 길이를 달리했기 때문이다. 난간은 평난간인데 네 면을 두르는 일반적인 양식과 달리 계곡 쪽 앞면 두 칸과 측면 한 칸만 둘러 소박미를 더했다. 낭떠러지가 있는 쪽으로 난간을 최소화한 것으로 보인다.

금선정은 벽체 없이 네면이 개방된 소박한 구조다. 평난간에 앞면 두칸과 측면 한칸에 난간을 둔 점이 특이하다.
정자에 들어서면 바위를 때리며 빠르게 흐르는 물소리에 정신이 맑아진다. ‘소쇄’해 지는 기분이다. 계곡 상류 쪽 여울목에서는 맑고 투명한 물방울 수천 수 만개가 튀어 오른다. 황준량은 이를 보고 ‘얼음방울이 튄다’라고 말했다. 포항의 분옥정에서는 이 모습을 ‘옥이 분수처럼 터져 나온다’라며 편액 이름을 지었다. 계곡 건너편 언덕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노란색 야생화가 별처럼 반짝이고 언덕 너머 사과밭에는 순백의 사과꽃이 만개했다. 황준량은 ‘알록달록 꽃그림자가 봄산을 뒤흔든다’라고 썼다.

금선정이 있는 마을은 오랫동안 착한 사람이 많이 나오라는 뜻으로 장선(長善 장생이)마을이라 불리는데 본래는 긴 배처럼 생겼다고 해서 ‘배 선(船)’자를 쓰는 장선(長船)마을이었다고 한다. 계곡을 가만히 내려다 보니 정자 상류 쪽 계곡은 여울목 지나며 요란한 소리를 내다가 정자 앞에 와서는 고요히 흐른다. 그러다가 정자 앞을 지나면서 다시 돌과 부딪히며 소리를 내며 흐른다. 정자 상류 쪽이 포말을 일으키는 고물(선미)이라면 정자 정면은 선체, 정자의 하류는 물살을 가르며 달리는 배의 이물(선수)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장선마을이라기에 떠오른 생각이다. 정자 앞 계곡이 긴 배처럼 여겨진다.

금선정 앞에서 내려다 본 금선계곡.
황준량의 본관은 평해이며 자는 중거(仲擧), 호는 금계다. 금계천과 금선계곡이라는 이름은 황준량의 호와 황준량이 지은 금선대에서 비롯됐다. 경북 영주시 풍기읍 서부리에서 태어났다. 농암 이현보의 손자사위이며 퇴계 이황의 애제자다. 24세에 문과에 급제하고 홍문관 박사 호조좌랑 겸 춘추관기사관이 되어 ‘중중실록’과 ‘인종실록’ 찬수에 참여했다. 비밀리에 민정을 파악해 임금에게 보고는 ‘추생어사’를 거쳐 신녕현감과 단양군수로 부임했다. 단양군수 재직 시절 4천800자의 명문으로 엮은 ‘단양진폐소(丹陽陳弊疎· 단양군의 열 가지 폐단을 없애기 위한 방편’를 올려 이름을 떨쳤다.

이 소의 내용은 고스란히 실록에 기록됐으며 상소를 접한 명종은 “상소 내용을 보건데 10개 조항의 폐단을 진달(進達)하여 논한 것이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을 사랑하고 백성을 위한 정성이 아닌 것이 없으니 내가 아름답게 여긴다”고 답하고 단양에 20여 종의 공물을 10년간 감해주는 은전을 주었다. 성주목사 시절에는 영봉서원을 중수하고 공곡서당을 세웠다. 팔거현에는 녹봉정사를 세워 강학의 터전을 마련했다. 1561년에는 퇴계학문의 핵심 과제인 ‘주자서절요’를 발간했다. 이후 1563년 봄 병을 얻어 사직하고 귀향하던 중 예천에서 향년 47세의 아까운 나이로 숨졌다.

금선정이 있는 금선계곡. 비단결 같은 물살이 빠르게 흐르다 정자 앞에서 조용히 지난다.
황준량의 죽음을 가장 애석하게 여긴 사람이 퇴계 이황이었다. 그는 황준량이 죽자 손수 붓을 들어 관 위에 ‘선생’이라고 명정을 썼다. 스승이 제자에게 ‘선생’이라 일컫는 일은 선비 사회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한다. 또 행장을 지어 제자의 일생을 증언하기도 했다. ‘제문’과 ‘만사’도 이황이 직접 썼다. 젊은 나이에 길에서 객사한 제자에 대한 애통한 마음이 절절하다. “아, 슬프다 금계여!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성주에서 풍기까지 몇 리 되기에 미처 집에 이르지 못했단 말인가.(중략) 실성하여 길게 부르니 물이 쏟아지듯 눈물이 흘러내린다네. 하늘이여! 어찌 이리도 빠르게 이 사람을 빼앗아 가시나이까? 진실인가 꿈결인가 너무 슬퍼 목이 메인다오”(이황의 ‘제문’ 중에서)

황준량이 죽자 이황은 ‘금계집’편찬과 금양정사 건축에 힘을 기울인다. 이황은 황준량이 남긴 시문 4권을 받아 교열은 물론 편차까지 직접 마친 뒤 발문을 이산해에게 부탁해 발간했다. 이산해는 발문에서 “성정에 바탕을 두고 음률을 조화시켜 화려함과 실질을 겸비했고 의미가 심원하다”고 했다. 또 “문장에 뛰어나서 지필묵을 잡고 글을 지으면 처음에는 엉성하여 주제를 다루지 못하는 듯 보이나 읽어보면 봄 구름이 하늘을 떠가는 듯 하늘의 꽃잎이 햇살에 비치는 듯 원숙하고 혼후하여 그 끝을 다 엿볼 수 없다”라고 극찬하고 있다.
계곡 건너편 언덕에서 본 금선정. 노란색 야생화가 언덕을 뒤덮고 있다.

금계집에는 스승인 이황과 주고 받은 편지글과 시, 이황 학문의 업적 등을 기록한 문건이 여러 건 있어 두 사람 사이가 보통 친밀한 사이가 아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황준량과 이황이 사제간으로 특별한 친분을 유지하게 된 데는 처 조부인 농암 이현보의 역할도 적잖았던 것으로 보인다. 세 사람이 어떤 사이였는지를 보여주는 그림이 한 장 있다. 이현보와 이황이 함께 낙동강 상류인 분강의 점석(편편한 돌)에 앉아 ‘점석유상’이라는 풍류 즐겼는데 조금 떨어진 곳에서 황준량이 함께 있는 모습이다.

금양정사는 황준량이 성주목사 시절 퇴후지지 였다. 고향에 돌아가 강학을 염두에 두고 추진하던 사업이었다. 이황은 제자의 숙원을 마무리 하기 위해 직접 발품을 나섰다. 이황은 금양정사를 둘러본 뒤 풍기군수와 서애 류성룡의 형인 겸암 류운용 등에게 특별히 금양정사 수호를 당부했다. 역시 이황의 제자였던 류윤용은 “퇴계 선생께서 돌보시며 수호하려는 계책이 아득한 곳으로 떨어져 접함이 없으니 어쩌면 다만 땅을 지키는 사람들의 부끄러움이겠는가. 아니 또한 온 고을 선비들의 치욕이라 하겠다”라며 금양정사의 수호를 위해 분발하자는 발문을 남겼다. 금양정사는 경북도 문화재 383호 지정됐는데 금양정사 옆 욱양단소(욱양서원)에서 이황과 황준량을 배향하고 있다.

글·사진 김동완 여행작가

황준량은 벼슬살이를 하는 동안 늘 마음은 금선대가 있는 금선계곡에 있었다. ‘매번 벼슬에 뜻을 빼앗기고 관청의 사무로 괴로움을 당해 병이 깊어진다고 여기고 어느 날 바람처럼 벗어나고자 생각하였다’(이황이 쓴 황준량 ‘행장’에서). 그의 소망은 이뤄지지 않았다. 병이 들어 벼슬을 사직하고 고향 풍기로 돌아오던 중 세상을 떴다. 금선계곡 옆에 금양정사 터를 닦은 뒤 그는 기쁜 마음으로 시를 썼다. 시를 보면 그가 얼마나 이곳으로 돌아오고 싶어 했는지 절절하다.

구름 사이의 정사는 속세의 먼지와 멀리 있으니
주경야독 즐거움이 진짜로다
복숭아 꽃이 모두 떨어지니 봄이 적막하고
도화원을 묻는 사람은 더 이상 없구나
- 황준량의 시 ‘금계에 정사를 짓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저작권자 © 경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