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드리 은행나무 그늘 아래서 자연 벗삼아 풍류를 즐기다

▲ 경렴정은 주세붕이 백운동서원을 세울 당시에 건립했다.
영주는 선비의 고장이다. 선비의 고장이라는 영주의 자부심은 대한민국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紹修書院)에서 나온다. 풍기군수로 부임한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 1495년 ~ 1554년)이 1543년(중종 38)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 숙수사 자리에 세웠다. 숙수사 자리는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성리학자인 안향이 어릴 적 놀던 곳이다.

이곳에 안향을 배향하는 회헌사당을 세우고 사당 동쪽에 서원을 건축했다. 건축당시 이름은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다. 중국 송나라 때 주자가 세운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에서 따왔다. “여산에 못지않게 구름이며 산이며 언덕이며 강물이며 그리고 하얀 구름이 항상 서원을 세운 골짜기에 가득”하여 그렇게 이름했다.

▲ 경렴정과 500년 수령의 은행나무
백운동서원이 소수서원으로 사액을 받게 된 결정적 역할은 퇴계 이황이 했다. 풍기군수로 부임한 이황은 경상도 관찰사 심통원을 통해 백운동 서원에 조정의 사액을 바라는 글을 올리고 국가의 지원을 요청했다. 

“풍기의 백운동서원은 황해도 관찰사 주세붕이 창립한 것인데 그 터는 바로 문성공 안유가 살던 곳이고 그 제도와 규모는 대개 주문공이 세운 백록동을 모방한 것입니다. 무릇 학령을 세우고 서적을 비치하며 전량과 공급의 도구를 다 갖추어서 인재를 성취시킬만 합니다. 편액과 서적 토지 노비를 하사해 줄 것을 청하였는데 다 따라줄 수는 없으나 편액과 서적 등 2~3건 만이라도 특명으로 내려보낸다면 먼 곳의 유생들이 반드시 고무 감격하여 흥기할 것입니다” 이에 명종은 대제학 신광한에게 서원의 이름을 짓게 했다. 

경렴정은 ‘염계’ 주동이를 경모한다는 뜻으로 지은 이름이다. 편액 글씨는 퇴계 이황이 썼다.
신광한은 “이미 무너진 유학을 다시 이어 닦게 했다(旣廢之學 紹而修之)” 는 뜻으로 ‘소수서원’이라 이름하고 편액을 내렸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이다.

경렴정은 소수서원 입구에 있다. 외삼문 앞 오른쪽에 있다. 보통 서원의 정자들이 서원의 안쪽에 자리를 잡은 것과 대조적으로 경렴정은 서원 경내 바깥에 있다. 일정한 배치 규칙이 없던 초기서원 배치 방식의 단면을 보여준다. 경렴정은 주세붕이 서원 건립할 당시 세웠다. 원생이나 유생이 자연을 벗 삼아 시회나 회합을 열어 풍류를 즐기고 휴식을 취하는 공간으로 활용했다. 

경렴정의 ‘경렴’은 염계(濂溪)주돈이(周敦頤 1017~1073)를 경모한다는 뜻이다. 주돈이는 장시성의 루산 개울가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그 개울이 염계다. 개울가에 염계서당을 짓고 자기를 염계선생이라고 했다. 중국 성리학의 틀을 만들고 기초를 닦은 인물로 평가된다. 그는 도가와 불교의 주요 인식과 개념들을 받아들여 우주의 원리와 인성에 관한 형이상학적인 새로운 유학 이론을 개척했고, 그의 사상은 정호ㆍ정이 형제와 주희 등을 거치며 이른바 정주학파(程朱學派)라고 불리는 중국 유학의 중심적 흐름을 형성했다. 

경렴정에서 바라본 죽계천과 취한대. 편액의 초서 는 고산 황기로가 썼다
주돈이는 조선의 선비들의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다. ‘광풍’과 ‘제월’같은 정자이름도 주돈이에서 비롯됐고 군자를 연꽃에 비유해 정자나 정원에 연꽃을 심는 전통도 주돈이의 ‘애련설’에서 나왔다. 연꽃에 빗대어 군자의 덕을 이야기한 이 산문은 중국의 한문학을 대표하는 글 가운데 하나로 널리 읽히고 있다.

경렴정에는 해서체와 초서체 두 가지 편액이 걸려있다. 정면의 해서체 편액은 퇴계 이황의 글씨이고 내부에 있는 초서체 글씨는 고산 황기로의 글씨다. 황기로는 어느 날 스승 이황을 만났는데 그 자리에서 경렴정 편액글씨를 써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스승 앞에서 글씨를 쓰기가 부담스러웠다. 스승이 자리를 피해주었다. 일필휘지, 용사비등으로 붓을 날려 쓴 글씨가 경렴정 편액이다. 황기로는 초서를 잘 써 김구 양사언과 함께 ‘3대 초성(草聖)’이라 불렸다. 경렴정 안에는 두 개의 현판 외에도 주세붕과 이황, 황준량, 안현 등의 시가 걸려있다.

취한대는 이황이 지었다. 취한대에서 바라보는 경렴정이 경승이다.
산은 우뚝하여 공경하는 빛이요
시냇물은 흘러 가며 부지런히 소리를 낸다
깊은 곳에 사는 사람의 마음에 깨달음이 있어
한밤 높은 정자에 기대어 있노라
-주세붕의 시 ‘경렴정’

경렴정 옆을 흐르는 짙푸른 내는 죽계천이다. 봄빛이 잘 들었다. 경렴정과 취한대 사이를 유유히 흐르며 고운 빛으로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비로봉과 국망봉을 잇는 준령에서 발원하며, 이들 물줄기가 배점리에서 송림지에 모인다. 죽계천(竹溪川)은 거기서 다시 남쪽으로 흐르면서 장계들에서 단산면으로부터 흘러든 단산천과 만나고, 계속해서 남쪽으로 흐르다가 창부들에서 풍기읍으로부터 흘러든 남원천과 만나 서천을 이룬다.

죽계는 아름다운 경관 덕에 선비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죽계가 고향인 안축(1287~1348) 은경기체가 죽계별곡을 지었다. 이황은 죽계천 유역의 아홉 경승을 골라 ‘죽계구곡’을 선정했다. 1곡 백운동 취한대(白雲洞翠寒臺), 2곡 금성반석(金城盤石), 3곡 백자담(栢子潭), 4곡 이화동(梨花洞), 5곡 목욕담(沐浴潭), 6곡 청련동애(靑蓮東崖), 7곡 용추비폭(龍湫飛瀑), 8곡 금당반석(金堂盤石), 9곡 중봉합류(中峯合流)이다.

경자암. ‘경’자는 주세붕이, ‘백운동’은 이황이 새겼다.
죽계구곡 중 1곡으로 꼽힌 백운동 취한대는 겸령정 건너편에 있다. 이황이 송백과 대나무를 심고 취한대라 이름했다. 연화봉의 기운과 죽계수의 맑고 시원한 물빛에 취해서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긴다는 뜻을 담고 있다. ‘송취한계 (松翠寒溪)에서 따왔다,죽계천을 사이에 두고 경렴정과 대각선으로 마주 보고 있다. 경렴정에서 보는 취한대가 경승이듯이 취한대에서 보는 경렴정은 아름다운 경관이다. 이황은 취한대에 앉아 경렴정을 바라보며 시를 짓거나 술을 마셨다고 한다. 불에 타 없어졌다가 1986년 새로 신축했다.

풀잎도 대개 그러한 뜻을 품고 있고
시냇물은 끝없는 소리 머금었다
노니는 사람들아 믿지 못하겠거든
맑고 깨끗한 빈 정자에 한번 있어보

- 이황이 차운한 시

경렴정에서 바라본 소수서원 외삼문과 학자수

경렴정 물가 맞은편에 있는 바위가 경자암이다. 취한대에서 조금 북쪽으로 올라가면 있다. 붉은 색으로 ‘경(敬)’자가 새겨져 있고 그 위에 하얀색으로 ‘백운동(白雲洞)’이라는 글자가 각자 돼 있다.‘경’은 서원을 창건한 주세붕이 새겼고 ‘백운동’은 이황이 썼다. ‘경’은 ‘경이직내 의이방외 敬以直內 義以方外’에서 따왔다. ‘경으로써 마음을 곧게 하고 의로써 밖으로 드러나는 행동을 반듯하게 한다’는 뜻이다. 

주세붕은 안향을 선사로 경모하여 서원을 세우고 후학들에게 안향의 학문을 이어가게 하려했다. 세월이 흘러 건물이 허물어져 없어지더라도 ‘경’자 만은 후세에 길이 전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또 서원에 들어와 공부하는 유생들이 이 글자를 보며 마음을 수양하기를 바랬다.

▲ 글·사진 김동완 여행작가

경렴정을 돋보이게 하는 조연은 경자암과 죽계천 말고도 500년 묵은 은행나무다.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정자 옆에서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낸다. 정자 안에서 소수서원 매표소 쪽으로 바라보면 비슷한 수령의 은행나무가 한 그루 더 서 있다. 

은행나무 옆에는 이곳이 숙수사 옛터 였음을 알려주는 당간지주가 서 있고 그 옆으로 오래된 소나무 수백그루가 서원을 에워싸고 있다. 이른바 학자수(學者樹)다. 덕망높은 학인들이 무수히 배출하라는 뜻으로 천 그루를 심었다고 한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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