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남산 칠불암 마애불상군.
경주 동남산 남산리 마을에서 봉화골로 오르면 칠불암(七佛庵)까지 1시간여 소요된다.

골따라 신록들이 바람에 넘실거리며, 물줄기가 졸졸거리니 심신이 더욱 상쾌하다. 5년여 만에 칠불암 마애불상군을 찾았다.

통일신라시대 불력(佛力)으로 나라를 지키기 위해 동남산 벼랑 아래 절을 짓고, 큰 바위에 불상을 일곱 개나 새겨놓았다.

뒤편 바위 면에 삼존불이 있고, 바로 앞 사면체 바위에 돌아가며 사방불이 있어 칠불암이다. 남산 불상군(南山 佛像群)중 가장 높은 데 있고, 가장 큰 마애불상으로 국보 312호다.

필자는 10년 전 경주시 문화유산해설사로 처음 배치돼 일주일에 두어 번씩 방문객들에게 해설했다.

경주시가 한창 문화재를 밖으로 알리기 시작하던 때다. 여름이면 아침저녁 오르락내리락 해 온몸에 땀이 흘러도 우리 문화유산을 알리는 데 신명이 났고 의욕과 보람에 가득 찼었다. 이곳이 나의 일터 겸 쉼터처럼 친근하던 시절이다.

암자 바로 밑 샘터에서 시원한 물 한 바가지를 떠 마셨다. 옛 맛 그대로다. 그리고 주변에 낙엽을 걷어내고 청소도 했다. 칠불암에 대해 작은 예의라도 갖추고 싶어서이다. 전에 없던 요사채인 ‘대안당( 大安堂 )’이 들어서 있다. 힘들게 올라왔으니 한껏 쉬어가라는 뜻일 게다. 여기서부터 칠불까지가 제일 힘든 코스다. 20여 m도 안 되지만 가파른 언덕길에 돌계단이 비탈져 있고, 좌우 울창한 대나무 숲이 터널로 이어져 더욱 힘들다. 칠불암 불계 문턱에서 마지막 세속의 진을 빼는 108번뇌의 길이라고 전해온다. 이 난코스는 칠불에 이르는 고행의 길로, 여기를 힘겹게 오르면 바로 눈앞에서 칠불이 “수고들 했네”하고 반갑게 맞아준다고 해서 부쳐진 이름이다. 애초 계단이 108개였다고 전한다.

칠불암 마당에 있는 황법련화공덕비.
칠불이 나를 굽어보며 “어서 오시게나, 참 오랜만일세” 한다. 여전 변함없이 그들은 그때처럼 조용히 나를 미소로 반긴다. 칠불 마당 주변 소나무들이 더욱 굵어져 있다. 한적한 암자는 목탁소리와 새소리에 묻혀있고, 마당 한 곁에 숨은 듯 비껴있는 까만 비석, ‘황법련화공덕비(黃法蓮花公德碑)’가 반갑다고 비식 웃는 것 같다.

1930년쯤 일이다. 아래 고을 남산리에 ‘황씨’라는 할머니가 살았다. 어느 봄날, 나물을 캐러 봉화골 따라 올라와 산 능선 바위에 쉬고 있는데, 잡목 속에서 암벽에 새겨진 불상이 보였다. 울렁거리는 가슴을 안고 수풀을 헤쳐 보니, 거기에 일곱 분의 부처님이 자기를 보고 웃고 계시는 게 아닌가? 아들과 함께 벌목과 석불 주변을 정리했다. 그 옆에 흙벽 암자를 짓고, 부처님을 모셨다. 그때부터 이곳을 칠불암이라 하고, 일제 강점기에 보물 제325호, 해방 후 보물 200호, 지금은 국보 제312호로 승격되어 있다.

할머님 돌아가신 후, 그녀의 법명(法名)을 부쳐 비석을 만든 것이 ‘황 법련화공덕비’다. 큰 공덕에 비해 비(碑))가 너무 왜소해 보인다. 할머님은 죽어서도 봉화골 능선에 묻혀, 항상 칠불암의 안녕을 빌고 있는데, 등산객들은 이 비가 무슨 비인지, 왜 여기 있는지 눈길 한번 주지 않고 그냥 지나쳐버리고 만다.

8년 전 경주시가 암자를 새로 지을 때 일이다. 이곳에 외국인 비구니 스님이 계셨다. 헝가리 출신 젊은 스님이었다. 보릿대 모자를 눌러쓰고, 공사장에서 돌을 줍고, 인부들 공양 시중하며 바쁘게 불사를 도왔다. 그런 와중에도 미소를 잃지 않고 불자들에게 공양도 챙겨주며, 상냥하고 친절했다. 한국말도 능통하고 예쁘니 모두 그녀를 좋아했다.

경주 남산 칠불암마애불상군

특히 그림을 잘 그렸는데, 그녀의 기왓장 그림들은 상당한 수준급이었다. 그중 달밤에 모자를 쓰고, 석장을 짚고 어딘가로 훌훌히 떠나는 스님 뒷모습을 그린 그림이 있었다. 그 속에 ‘Where are you going now?’라는 글이 적혔는데, 그녀 자신이요,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한 그 화상과 화두가 지금도 가슴에 짠하게 남아있다. 그녀 지금 어디 있을까 궁금하다.

칠불암 우측으로 해서 신선암으로 오르는 길은 깎아지른 듯 가파르다. 군데군데 계단을 만들어 놓긴 해도 아슬아슬하다. 철쭉들이 낮은 소나무와 어울려 수를 놓은 듯 여기저기 아름답게 피어있다. 이곳에서 칠불암 뒤편 봉화골 정상에 오르는 길은 남산 팔경 중 그 경관이 가장 빼어나다. 더구나 낭떠러지 절벽에 반가사유상 보살님(보물 제199호)이 새겨져 있다.

하늘에 떠 있는 불상이 구름 위로 날아가는 듯 그 모습이 산뜻하고 아름답다. 저 멀리 펼쳐있는 경주 들판을 내려다보고 섰노라니, 지금 내가 감히 신선이 되어 부처님과 함께 구름을 타고 불계창공(佛界蒼空)을 나르는 것 같다.

(이 기사는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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