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강변 갈매기 벗삼아 시 한수 차 한잔…풍류가 따로 있나

임진강 강언덕에 나란히 서 있는 앙지대(왼쪽)와 반구정.
갈매기를 벗하며 퇴후를 보내겠다는 방촌(厖村) 황희(黃喜 1363~1452)의 소망은 그의 나이 87세가 돼서야 이뤄졌다. 그는 1449년(세종31년)에야 64년의 험난한 공직생활을 벗어났다. 무거운 짐을 벗어던진 그는 날이 맑은 날이면 고향땅 개성의 송악산이 아득히 눈에 들어오는 파주 임진강변에 정자를 짓고 강위에 만국기처럼 펄럭이는 갈매기를 친구 삼아 시를 지으며 여생을 보냈다. 그 정자가 ‘반구정’이다. 갈매기를 벗하며 지내겠다는 소망을 담은 이름이다.

반구정은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사목리 임진강변 강언덕에 있다. 이 일대는 낙하진(洛河津)과 붙어 있으므로 ‘낙하정’이라고 했다가 임진강변을 가득 채운 갈매기를 벗하며 놀겠다고 반구정이라 했다. 황희는 1376년 14살 (우왕2)에 벼슬에 오른 뒤 공양왕 조선의 태조 정종 태조 세종까지 격변의 세월을 몸으로 겪었다. 역성혁명이 일어나 국호가 바뀌는 걸 숨죽여 지켜봤고 왕자의 난을 겪으면서 피비린내 나는 골육상쟁을 지켜봐야 했으며 소신을 굽히지 않다가 유배의 고초도 겪었다. 그 세월이 거의 64년이다.

반구정은 황희가 지은 정자다. 그는 64년의 공직생활을 끝낸 뒤 안분지족의 삶을 살았다.
파란만장한 세월을 보냈다. 고려가 망하자 조선왕조 창업에 반발해 두문동에 들어 갔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태종과 세종의 굳건한 신임을 받으며 24년간 재상의 자리를 유지했다. 영의정만 18년을 지냈다. 태종은 3살이나 많은 그를 자식처럼 아꼈다고 말했을 정도다. 그러나 그는 태종의 이같은 절대적 신임에도 할말은 하는 소신있는 선비였다. 양녕대군 폐위때 이조판서이던 그는 ‘폐장입유/ 장자를 폐하고 아랫사람을 세움)’의 부당함을 주장하다 4년간 유배살이를 하기도 했다.

반구정편액. 황희가 갈매기를 벗 삼아 살겠다는 뜻으로 이름했다.
황희는 그가 그토록 반대했던 세종이 왕이 되면서 오히려 날개를 달게 된다. 한글창제에서부터 농사개량사업 6진개척, 장영실 발탁에 따른 과학발전 등 세종성세를 이루는데 큰 공을 세워 조선 왕조를 통해 가장 명망있는 재상을 추앙받았다. 그러나 그 세월이 얼마나 고단하고 수고스러웠겠는가. 남은 생을 갈매기 벗삼아 보내겠다는 그의 심정이 어떠했는지 짐작이 간다. 그가 유유자적한 전원생활을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보여주는 시가 한편 있다.“ 대추볼 붉은 골에 밤은 어이 떨어지며 /베 벤 그루에 게는 어이 나리는고/ 술 익자 체 장사 돌아가니 아니 먹고 어이하리”

임진강변 언덕 위에 있는 반구정은 푸른 물결이 발아래 넘실거리고 강물위에는 배들이 오락가락 하고 배를 따라 흰 갈매기 날며들며 아름다운 풍광을 뽐냈을 것이다. 강 건너편 아득한 곳에 개성의 송악산이 눈에 들어와 병풍 속의 그림을 보는 듯 무아지경의 풍치가 펼쳐졌을 것이다. 그러나 21세기 5월의 반구정 풍경은 삭막하다. 강물은 황토빛으로 뒤덮였고 흰갈매기 뛰놀던 곳은 고기잡이 그물 부표가 떠 있다. 반구정과 임진강 사이에는 철조망이 둘러쳐져 있고 철조망을 지키는 군인초소까지 있어 살벌하다. ‘돌아다녀보면은 조선팔도 모든 명당은 초소다’( 황지우의 시 ‘길’ 중에서)는 황지우의 말은 자로 잰 문짝처럼 꼭 들어맞는다. 반구정 앞의 군인초소는 반구정이 경승지임을 증거하는 자료다.

황희선생 제사를 모시는 경모재
황희는 반구정에서 3년동안 은거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후 160년이 지나 후손 황생이 쓰러진 반구정을 다시 세웠다. 그 때 미수 허목이 1665년에 ‘반구정기’를 썼다. 17세기 반구정 풍경을 허목의 글을 통해 복원한다. “반구정은, 먼 옛날 태평 재상 익성공(翼成公) 황희(黃喜)공의 정자이다. 황희가 죽은 지 2백 년이 채 못 되어 정자가 헐렸고, 그 터전이 쟁기 밑에 버려진 땅이 된 지도 1백 년이 된다. 이제 황희의 후손 황생(黃生)이 강 언덕에 집을 짓고 살면서 옛 이름 그대로 반구정이라 하였다. 이는 정자의 이름을 없애지 않으려 함이니 역시 훌륭한 일이다. (중략)정자는 파주 부치에서 서쪽으로 15리 되는 임진(臨津) 가에 있는데, 썰물이 물러가고 갯벌이 드러날 때마다 갈매기들이 모여든다. 강가의 잡초 우거진 벌판에는 모래밭으로 꽉 찼다. 또 9월이 오면 기러기가 찾아든다. 서쪽으로 바다 어귀까지 10리이다.”

반구정 아래에 있는 황희선생 동상
설월당 김부륜은 20살에 퇴계의 문하에서 수학한 뒤 현감벼슬을 한 인물이다. 그는 15년전에 반구정을 한 번 찾은 뒤 백발이 되어 다시 정자를 찾았다. 경치가 빼어나서 인지 황희라는 인물을 흠모해서 인지, 경치와 인물 두 가지를 다 좋아해서 인지 시만 봐서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공직을 떠난 나이가 돼 제비처럼 자유로이 왔다갔다 할 수 있으니 갈매기 부럽지 않다는 대목에서 자유의 몸으로 임진강변 정자에 앉아 시를 읊조리는 황희가 연상된다.

십오년 전에 이 낭떠러지 위에 앉았었고
지금 부끄럽게도 백발이 되어 강물에 임하였네
멀리 숲으로 돌아가는 새는 안개 속에 사라지고
빽빽한 나뭇잎에서 매미우는 소리는 비온 뒤에 더욱 요란하네
자연의 경치는 정이 있어 머물고 있는 길손을 취하게 하고
강산은 사람의 근심에 대해서는 말이 없네
마음대로 왔다갔다하는 제비 같은 이몸이
물 가운데 둥실둥실 뜬 갈매기가 부럽지 않네

- 김부륜(1531~1598)의 시 ‘반구정 운을 따라’

앙지대에서 본 반구대와 임진강. 강으로 내려가는 길은 철조망으로 가로 막혔다.
반구정은 여러차례 증축과 개축을 거듭하다가 1998년 유적지 정화사업의 하나로 개축됐다. 정면 2칸 측면 2칸의 장방형이다. 정자 안에는 허목과 윤희구의 ‘반구정기’ 현판이 걸려 있다. 강언덕길에 반구정과 어깨를 나란히 하다시피하고 서 있는 육각형의 정자는 앙지대(仰止臺)다. 앙지대도 황희가 지었다고 한다. 정자 안에 걸려 있는 ‘앙지대중건기’는 1973년 파주군수 우광선이 썼는데 그 내용을 담고 있다. 앙지대가 있는 자리가 본래 반구정자리이다. 1915년 어떤 이유에서 인지 반구정을 아래쪽 넓은 곳으로 옮기고 반구정이 있던 자리에 앙지대를 세우고 육각(정자를 지었다.

반구정에서 내려다 본 임진강.

‘앙지’는 ‘우러러 사모한다’는 앙모와 같은 뜻인데 황희는 무엇을 우러러 사모했을까. 이에 대한 답은 앙지대 상량문에 적혀있다. “오직 선(善)만을 보배로 여기고 다른 마음이 없는 한 신하가 있어 온 백성이 우뚝하게 솟은 산처럼 모두 쳐다본다. 아름답구나! 앙지대란 이름은 시경(詩經)의 호인(好仁)이라는 뜻을 취했다”

‘호인’은 ‘부국군호인천하무적(夫國君好仁天下無敵)’의 줄임말이다. 나라의 임금이 인을 좋아하면 천하에 적이 없다는 뜻이다.앙지대에서 보는 반구정의 경관이 빼어나다. 반구정과 반구정 옆으로 길게 늘어선 임진강물, 모래사장과 녹음이 별유천지 같다. 다만 강물에 다가가지 못하도록 막아선 철조망만 빼면. 황희의 17대 손이 우산 황유주(1912~19830는 새로 지은 앙지대에 앉아 반구정을 바라보며 시를 지었다.

단청도 새롭구나 다시 지은 앙지대
달빛 아래 물가에 하얀 분벽이 부침하네
만고의 산 모습은 병풍안의 그림이요
천추의 오랜 옛일 꿈속에 흐르네
반구정은 당시의 일을 말하지 않고
가로뻗은 삼팔선만 고국의 시름 더해주네
익성공어른께서 노시던 곳이 어디멘가
필시 임진강 가의 저 한 고루이겠지

- 황유주의 시 ‘앙지대운’

글/사진 김동완 여행작가
반구정과 앙지대는 ‘황희선생유적지’에 갇혔다. 파주시 등이 반구정이 있던 자리를 중심으로 담장을 치고 성역화했다. 정자가 있는 강언덕 아래 황희의 동상이 있고 영정을 보관한 영당, 제사를 모시고는 경모재가 있다. 황희의 유물전시관인 ‘방촌전시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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